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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안나 신 May 17. 2020

준비가 안 됐으면 어때

“완벽히"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4년 전쯤이었다. 태국 소재의 아시아 채용 스타트업에서 일했던 나는 인재 소싱 및 매칭 자동화를 위한 그로스 해킹 업무를 담당했는데, 당시 한국에서 해외 취업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부쩍 늘고 있었고 나 또한 어렵게 해외에서 취업과 이직을 한 케이스였기에 한국 시장의 채용 컨설턴트 역할을 자청하여 한국 인재와 외국 기업 간의 다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덕분에 1년여간의 재직 기간 동안 취업 설명회부터 온라인 커뮤니티까지, 꽤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 몇백 명에 이르는 인재들과 소통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나를 가장 맥 빠지게 만들었던 대화 패턴은 다음과 같았다.


"저 진짜 외국에서 일하고 싶어요! 싱가포르요? 싱가포르 좋죠. 근데 비자는 어떻게 받아요? 얼마나 걸려요? 집세 및 생활비는 얼마나 돼요? 제 경력이면 연봉은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어요? 네? 다음 주 인터뷰요? 아 다음 주는.. 제가 아직 영어 인터뷰 준비가 안돼서.. 영어 공부 더 하고 다음에 할게요."


해외 취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엄청난 질문 공세를 퍼부은 이들의 90% 이상이 막상 면접의 기회가 오면 미숙한 영어 실력, 장거리 연애에 대한 걱정, 자녀의 교육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면접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도할 기회마저 포기한 그들 중 대부분은 (적어도 내가 소식을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한국에서 해외 취업에 대한 막연한 꿈만 꾸며 해외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왜 우리는 준비에 집착할까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나갈 무렵이 돼서야 딱 한 번 볼 수 있는 수능은 12년간의 학창 시절에 대한 평가의 잣대가 되고, 그렇게 시작한 대학 생활의 성공 여부는 많아봐야 1년에 두 번밖에 없는 공채나 고시를 통해 판가름되는 환경에서 자라온 우리에겐, 어쩌면 많은 시간을 쏟아 치열히 준비하는 것이 일단 해보는 것보다 더 편하고 익숙한 것일지 모른다.


나 또한 그랬다. 시험이든, 발표든, 입시든, 취업이든, 꼭 잘 해내야만 하는 관문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남들보다 더 완벽히 준비해야만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원체 낯을 가리고 말을 잘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불편함은 내게 배가 되어 다가왔는데, 그래서 아프단 핑계로 발표를 미루고 갑자기 걸려온 전화 면접 도중 신호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끊어 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 온 다른 친구들은 달랐다. 버벅거리며 횡설수설하더라도 별다른 준비 없이 발표를 해냈고, 어떤 때에는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한 대본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히 발표한 나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았다. 준비 시간과 결과에는 비례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매끄럽지 않은 발표가 발표할 기회를 아예 포기하는 것보다 나았다.


무조건 좋은 결과보다는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내가 이 면접을 망친다 한들 떨어지기밖에 더할까? 불합격 통보 이메일을 받는 것은 물론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그냥 바로 휴지통으로 삭제해 버리면 이는 결국 수많은 스팸메일 중 한 통이 될 뿐이다. 한 번 탈락 후 재지원까지의 기간이 제한되어 있는 회사도 있지만, 구글 떨어지면 페이스북 가고 페이스북도 떨어지면 링크드인 가면 되지 아니한가. 수많은 유니콘 회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는 시대에서, 유망 회사와 직종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변화하고 있다.


만약 이번에 실무 면접에서 떨어졌다면 다음번엔 실무 면접을 통과하는 것을 목표로, 최종 경영진 면접에서 떨어졌다면 다음번엔 최종 면접을 통과하는 것을 목표로, 이렇게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목표를 이루는 데에 훨씬 많은 도움이 된다.


만약 면접은 붙었지만 다른 외부적인 요소가 이주에 걸림돌이 된다면? 회사에 최대한 도움을 요청해보고 (예: 교육비, 이주 비용 등 재정적 지원, 이주 준비 기간 연장, 가족 비자 지원), 해당 회사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도움을 줄 수 없는 경우 그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다른 회사를 찾으면 된다. 협상 과정을 반복하며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더 정확히 알게 되고, 또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급여와 복리후생에 대한 협상은 실패를 반복할수록 더 전략적이고 효율적으로 변한다.




우리가 그간 성취한 일들을 돌아보면, 좋은 결과의 원동력이 완벽한 준비였던 적은 많이 (혹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목표에 대한 기회가 왔다면 준비가 됐든 안 됐든 눈 딱 감고 일단 부딪혀보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출발 선상을 벗어나 서서히, 한 걸음씩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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