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바다, 수평선조차 지워진 듯한 완벽한 공허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목소리가 나를 그 절벽 끝에 데려다 놓았다. 그 바다는 '슬픔'이라 이름 붙여진 바다였다.
<양해말씀 드립니다>
저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경험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과 고통들이 담긴 이야기라 다소 표현과 감정들이 격할 수도 있고 과격할 수도 있어서 미리 양해말씀드립니다. 최대한 그런 표현들을 지양하고자 했으나 이 시리즈의 취지에 맞게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작성하게 되었으니, 혹시 읽으실 때 불편하시더라도 이런 마음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지옥 같은 고통을 끝내는 방법은 오직 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몸은 화석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삶에 대한 미련인지, 혹은 다가올 어둠에 대한 본능적 공포인지, 발은 지면에 뿌리를 박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나를 집어삼킬 그 검은 수면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그것은 다정한 위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나를 떠밀었다. 거칠고, 차갑고,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손길이었다. 나는 균형을 잃었다. 발밑의 단단한 지면이 사라지고 이내 나는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첨벙.
슬픔은 다정하게 젖어드는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슴을 세차게 내리치는 거대한 파도의 매질이었고, 수면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벽이었다. 수면과 충돌하는 순간, 나를 구성하던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 동시에 차가운 바닷물이 나에게 밀려 들어왔다.
따스했던 숨은 순식간에 차가운 액체로 변하며 내 허파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폐에서 산소가 강제로 짜여 나간 자리에는 슬픔의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 슬픔은 나를 살아 숨 쉬게 한 산소가 순식간에 차가운 액체로 변하여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내 몸은 기괴할 정도로 무거워졌다. 슬픔을 흡수한 옷가지와 피부는 수백 킬로그램의 납덩이가 되어 나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수면 위로 팔을 뻗어 휘저어보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형체 없는 물 뿐이었다. 휘저을수록 나는 더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슬픔은 내가 붙들고 있던 모든 생의 의지는 도리어 나를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가장 무거운 닻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눈물이 터졌다. 시도 때도 없이, 눈을 뜨면 뜨는 대로 감으면 감는 대로 흘러넘쳤다.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었다. 베개와 이불, 내가 누운 침대가 젖어갔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영혼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통곡이었다. 꺼이꺼이 울다가 숨이 넘어가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며 울음을 토해냈다.
물속에서는 비명도, 통곡도,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슬픔은 나와 세상 사이에 거대한 벽을 세웠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것들조차 영원히 만질 수 없는 신기루가 되었다. 나만 들을 수 있었다. 나만.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은 이미 슬픔으로 막혀버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에서만 터져 나오는 통곡이 오장육부를 녹여 내렸다. 밖으로 나가지 못한 울음은 안에서 나를 부수고 있었다. 내가 빠진 것이 바다인지 내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흘린 눈물이 바다가 된 것인지, 바다가 내 눈물이 된 것인지 경계가 사라졌다. 바닷물과 눈물은 같았다. 둘 다 짜고, 둘 다 나를 삼켰으며, 둘 다 끝이 없었다.
이내 정신과 함께 이제는 신체마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뛸 때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이 피가 아니라 잘게 부서진 유리 조각 같았다. 온몸이 안에서부터 긁히고 찢어지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가슴이 조여왔다. 숨을 들이마시려 해도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호흡이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 자체가 폐를 난도질하는 가시 돋친 공기를 삼키는 일이었다. 내장기관들이 슬픔을 견디지 못했다. 근육들이 버티지 못했다. 뼈마저도 함께 반응했다. 몸 전체가 극한의 슬픔에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은 더 이상 짜낼 것이 없을 때까지 눈물을 쏟아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눈물이 마른 뒤에도 눈은 계속 무언가를 내보내려 했다. 피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눈이 뜨거웠다. 눈두덩이 부어올랐다. 시야가 흐려졌다. 목소리가 다 쉬었다. 울다가 소리가 사라졌다. 말을 하려 해도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성대가 슬픔에 닳아버렸다. 온몸에 열이 확 올라왔다. 안에서부터 불이 난 것 같았다. 열이 나면서 동시에 몸이 떨렸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부서져 내렸다. 마음에 큰 구멍이 생겼다. 그 블랙홀 같은 구멍이 내 모든 것을 빨아 드는 것 같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었다. 이것은 일상에서 느끼는 슬픔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론적 파괴 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어를 동원해도 이 감정을 채울 수 없었다. '아프다'는 말은 너무 가벼웠고 '슬프다'는 말은 너무 얕았다. 어떤 언어도 이것을 담을 수 없었다. 말을 잃었다. 안에서 들끓는 슬픔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울다가 지쳤다. 하지만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그리고 눈물이 마른 뒤에도 울었다. 소리도 나오지 않고 눈물도 나오지 않는 울음이었다. 그냥 몸이 떨렸다. 경련하듯 떨렸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중력은 나를 바닥 없는 구렁텅이로 끌어내리는 손길이 되었다. 나를 붙들고 있던 모든 생의 의지가 도리어 나를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가장 무거운 닻으로 변했다.
물속에서 세상의 소음은 먹먹한 박동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수면 위의 세상은 여전히 반짝이며 다정해 보였지만, 이제 그 빛은 나에게 온기를 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내가 '가라앉고 있음'을 잔인하게 증명하는 이정표일 뿐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은 푸른 멍처럼 물들고,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죽어가는 뇌가 만든 마지막 환상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각의 미궁에 빠졌다. 슬픔은 이제 나와 세상 사이에 거대한 벽을 세워, 손에 닿을 듯 가까운 행복조차 영원히 만질 수 없는 수중의 신기루로 만드는 형벌이 되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온도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이것은 일시적인 추위가 아니라, 나의 체온을 앗아가는 차가운 물속에서 내가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가는 과정이다. 물속으로 흩어지는 나의 마지막 기포는 세상에 내뱉는 마지막 탄식이었다. 그것이 위로 떠 올라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제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 차가운 물의 감옥에서 나는 오직 내 심장 소리만을 유일한 대화 상대로 삼아 가라앉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겉옷만 젖는 줄 알았다. 하지만 슬픔은 가차 없이 내 살결을 지나 뼈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 내 기억, 내 꿈, 사소한 습관들까지 축축하게 젖어들어 형태를 잃고 뭉개졌다. 물기를 머금은 자아는 너무나 비대해져서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를 수 있는 부력을 영구히 상실했다. 다시는 마른 상태의 온전한 나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슬픔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슬픔이라는 바다에 완전히 절여져, 다시는 온전한 나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하는 것이었다. 이 바다는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을 완전히 장악하여 나를 '슬픔 그 자체'로 바꾸고 있었다. 혈관을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농축된 슬픔의 염수가 되었고, 나는 서서히 기울어지는 난파선의 형상을 띠며 심연이 부르는 거대한 힘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빛이 멀어졌다. 소리가 멀어졌다. 수면이 아득해졌다.
슬픔이란, 나를 세상과 연결하던 유일한 닻이 끊어졌음을 깨닫는 찰나가 영원으로 늘어나는 고문이었다. 나는 이제 슬픔보다 더 깊은, 어떠한 소리도 빛도 허용되지 않는 '절망'의 심연을 향해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