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대한 편견

편견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by 조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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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각 낱말의 '정확한 정의(definition)'나 단어가 가리키는 '명확한 대상'에 대한 탐구는 보통 언어학자, 혹은 철학자들의 몫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용하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른다. 그렇다고 사전을 찾지도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단어를 오용하고, 남용하고, 악용한다. 그렇게 남용되는 단어들 중 하나가 '편견(prejudice)'이다. 취향 존중이 거의 권리처럼 자리 잡은 시대에, 편견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다. 오히려 대단히 부정적이다. 뭐, 일종의 반시대적(anti-zeitgeist) 행위라고 할까. 우리는 굳이 애덤 샌델의 『편견이란 무엇인가』를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편견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하고 있으며, 너무나 자주 그 단어를 오직 '느낌'으로 재단하고, 또 정죄한다.


하지만 나는 편견이 실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편견을 의미하는 prejudice는 어원적으로 '앞서 판단(prae + judicium)'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충분하고 객관적인 근거 없이 판단을 내려버리는 것' 곧 편견 행위이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면, 편견은 대부분 그렇게 사악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편견 행위를 한다. 편견은 우리 삶에 엄청난 '효율성'을 부여한다. 만약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현상들에 일일을 객관적 근거에 입각해 판단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루도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편견은 단점이 많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편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진리처럼 간주한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자신들이 (머리가 아닌) 삶으로 체득한 시대정신을 앵무새처럼 멍청하게 읊어댄다. 대학 졸업장은 곧 인격이라느니, 육체노동은 천한 것이라느니, 자녀의 삶은 부모의 체면이라느니, 자고로 남자는 연상의 여자와 결혼해선 안 된다느니 하는 것들. 그런 편견들은 불과 바다 하나 건넌 곳에선 허무맹랑한 소리가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편견을 진리로 간주하고, 매트릭스 속에 살아간다. 시대의 노예들, 피히테가 말한 감관의 노예들이다. 편견은 진리로 군림할 때, 정말 '악취나는' 편견이 된다.


사용자가 멍청하게 사용한다고 물건더러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편견엔 단점을 가리고도 남을 장점이 있다. 왜냐하면 편견은 기능적으로 '상당히 정확하고 신속한 인식/판단 체계'이기 때문이다. 편견은 실용적이다. 매번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작게 잡아도 적어도 90퍼센트는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주택 창문으로 연기가 나면 우리들 중 십중팔구는 화재가 발생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곤 소방차를 부를 것이다. 하지만 왜 소방차를 부르는가? 당신이 직접 화염을 본 것은 아닌데 말이다. 잘 생각해 봐라.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전자담배를 피우는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 그 연기가 뜨거운 불이 아닌 차가운 드라이아이스에서 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으니 상황을 앞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내게 '그게 말이 되느냐'라고 묻는다면, 오히려 내가 지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친히 예증해준 것이다. 내 말이 허황되게 들리는 이유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연기는 화재로 발생한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화염을 직접 보지 못했으면서, 즉 객관적 근거가 없으면서, 화재라고 판단하는 것은 선입견이다. 당신은 앞서 판단했다.


이처럼 편견은 정확성 높은 지식을 신속하게 낳는 인식/판단 체계이다. 밤길에 뒤에서 나는 발소리는 단지 같은 방향으로 걷는 평범한 사람일 수도 있고, 심지어 내 신발 소리일 수도 있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곧 강도나 치한'은 아니므로, 엄밀히 말하면 '편견'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은 참사를 예방하는 실용적인 지식이 될 수 있다. 어떤 방송에서 한 어르신이 홍어를 구입하는 한 흑인에게 '자네 부모가 전라도 사람인가'라고 묻는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어르신을 보고 '편견이 없는 신사'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고 체계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흑인이 홍어를 좋아할 수도 있고, 정말로 그의 부모가 전라도 출신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정도로 지나치게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는 (이른바 '편견 없는') 행위는, 주택에서 발생한 검은 연기를 '전자담배 마니아들이 모여서 베이핑 쇼를 벌이고 있는지' 고려하는 것만큼 허황되고 무의미하다.


우리는 충분한 근거가 없어도,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도, 명확한 데이터가 부재해도, 생각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그런 판단은 분명 '편견'일 테지만, 그 편견은 기능적인 의미에서 우리 삶을 무척 효율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편견에 대한 현대인들의 과도한 비난은 '편견에 대한 편견'이다. 우리는 모두 편견을 갖는다. 그리고 편견 덕분에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편견 없이 모든 현상을 일일이 엄밀하게 검증하려 든다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역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편견에 대한 편견'은 편견의 단점을 보여준다. 앞서 말했듯, 편견이 항상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다. 편견에 대한 편견도 그 경우다. 우리는 그동안 편견을 아무런 심사숙고 없이, 충분한 근거 없이, 정확한 데이터 없이 판단했다. 따라서 편견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다분히 '편견적'적이었다. 편견이 점점 더 부정적인 어감으로 굳어져 가는 지금, 이제 편견을 조금 너그럽게 봐주는 것이 어떨까? 이제 우리의 삶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신속함을 재평가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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