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이 생각한 대영제국
본 글의 목적은 조선말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윤치호의 '영국 인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사용할 사료는 윤치호의 『일기』다. 참고할 기간은 1883년부터 1906년. 범위를 이처럼 선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1880년대부터 1910년대는 제국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로, 영국제국의 영향력이 동아시아에서 급속도로 팽창하던 때였다. 동시에 1880-1910년은 1876년 강화도조약부터 1910년 한일병합까지 외세에 의한 조선의 존망이 결정되던 전환점으로, 조선 지식인들의 대외인식이 확장되고 근대사상들(문명화론∙사회진화론 등)이 점차 발전하고 다듬어지던 중요한 시기였다. 연구 시점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던 1876년이 아닌 1883년으로 잡은 이유는 윤치호가 일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던 해가 1883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일병합이 이루어졌던 1910년이 아닌 1906년 일기까지만 참고한 이유는 그 이후 1915년까지 일기 집필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일병합 이후 윤치호의 서양 인식은 급격히 변화했기 때문에 별도로 연구하는 것이 좋다.
윤치호의 영국 인식을 효과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선 '사람 윤치호와 그의 세계(1880-1910년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윤치호는 외국 경험이 풍부한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영어 구사 능력은 거의 완벽할 정도였고, 신실한 개신교도였으며, 셰익스피어부터 빅토르 위고까지 다양한 서양 서적들을 두루 탐독했다. 중국과 일본 등에서 거주하거나 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유학하면서 이른바 "서학(西學)"을 공부했고,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잠시 프랑스에 체류한 적도 있다.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엔 조선 사절단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또한 상하이와 홍콩,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런던과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제국의 수많은 도시들을 방문하고 여러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양인들이 이룬 형이상학적∙형이하학적 성취에 넓고 깊게 감탄했다. 한마디로 윤치호는 서양에 누구보다 친숙한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서양을 가까이서 관찰했기 때문에 오히려 '서양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았다: "미국 사람들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나 '인간의 자유'라는 말을 으스대며 자랑하는데, 이에 속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이는 없다. (...) 실제에 있어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정의(right)’가 아니고 사실상 ‘힘(might)’이다. "힘이 정의다"는 것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신이다(1890.2.14)."
윤치호에게 조국 조선은 애증의 존재였다. 그는 분명 조선을 사랑했다. 그러나 조선이 아직 개화하지 못했음에, 그리고 조선 정부가 너무나 무능하고 조선 인민이 너무나 무지하여 자체적으로 개화할 수 없다는 비관적 믿음 속에, 그는 조국을 부끄러워했다. 또한 서구열강들이 앞다투어 땅을 정복하고 군사적∙경제적으로 강성해지던 때에, 조선이 아직까지 중국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에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윤치호는 근본적으로 약육강식을 믿던 현실주의자이자 사회진화론자였다. 그는 조선이 주권을 지키기 위해선 외국의 선의에 기대선 안 되며, 오직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부국강병을 위해선 먼저 조선은 '개화'해야 했다. 개화를 외면하고 인민을 억제하는 전근대적 국가로 남는다면 조선의 독립은 무의미하다고 윤치호는 믿었다(1890.3.8). 그가 제국주의 침탈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조국에 분노했던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제국이 아닌 '개화하지 못하고 부패한' 조선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식민지의 식민지 됨은 근본적으로 식민지의 잘못'이라는 견해다. 윤치호의 조선은 소수의 부패한 위정자들이 전제적 권력을 휘두르면서 인민을 탄압하고 개화를 가로막는 한심한 국가였다. 부패한 정부가 인민을 지배하고, 그 결과 인민이 계속 무지한 이상, 조선은 계명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 윤치호의 진단이었다(1890.5.18).
이에 윤치호는 다소 극단적인 처방까지 내린다. 윤치호는 조선 정부의 악정과 (조선과 마찬가지로 비개화국인) 청나라의 간섭 속에서 조선의 인민을 구제하는 방안으로 '문명국의 자애로운 지배'까지 받아들이고자 했다. 쉽게 말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를 받아들여 그들의 '선한 통치'에 기대자는 것이다. 물론 윤치호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선의로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윤치호는 국제관계에선 '힘'만이 유일한 논리라는 것을 알았다(1890.2.14). 그러나 개화한 외국의 지배가 비개화한 조선의 지배보다 더 낫다는 것이 윤치호의 결론이었다(1890.5.18).
그렇다고 윤치호가 '외세의 지배를 영구적으로 받아도 괜찮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결코 비자주적 의식을 향유하지 않았다. 유영렬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윤치호는 인민의 복지와 교육을 장려하는 제국이 조선을 통치한다면, (설령 제국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조선은 점차 개화하여 건실하고 번영하게 될 것이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주권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지배와 복속이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식을 잉태하는 근대 제국주의의 모순이 언젠가 발화되리라 전망한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조선은 독립다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윤치호가 생각한 조선을 계명시킬 '문명국'은 어떤 제국일까.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윤치호에게 문명국은 대체로 영국∙러시아∙일본였다. 본 글의 연구 범위인 1880-1910년에 한정한다면, 이들 중 일본과 러시아에 대한 윤치호의 인식은 대단히 변덕스럽다. 과할 정도로 칭찬을 하면서도 몇 개월 후엔 증오심을 표출하기도 한다. 극과 극을 오간다. 그러나 1880-1910년대, 특히 19세기 말 윤치호의 영국 인식은 비교적 일관적이다. 윤치호는 영국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1885년에 영국이 거문도를 강점하는 사건이 있었음에도, 그리고 거문도가 아직 반환되기 전이었음에도, 윤치호는 빅토리아여왕 즉위 50주년 경축화에 참석해 "영국의 위엄과 영국 여왕의 장성함은 실로 만고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라고 썼다(1887.6.25). 또한 윤치호는 런던을 처음 방문했을 때 "너무 기뻐 멍할 정도로 심장이 떨렸다."고 일기에 적기도 했다(1896.5.16). 어떤 지역을 방문하고 이 정도 수준의 감탄사를 남긴 것은 런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윤치호의 일기엔 영국의 강력함에 대한 찬사가 직접적으로 혹은 자주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바로 '영국은 조선 개화의 사명을 맡기기에 가장 괜찮은 제국'이라는 것이다. 이는 앞서 논했던 윤치호의 세계관, 곧 조선 개화에 대한 비관주의와 대리 지배의 필요성과 연결된다. 윤치호는 영국이 조선을 '접수하여' 조선을 개화시키길 바랐다:
"조선인들이 그처럼 그들의 상태를 개선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면 영국이나 일본이 전적으로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이 그들에게 다행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1889년 9월 28일
"이왕 청인의 속국 될 바에야 차라리 러시아나 영국 속국이 되어 그 개화를 배우는 것이 낫겠다." 1889년 10월 11일
"중국 아래 있는 것보다는 영국 아래 있는 것이 분명히 더 좋을 것이다.” 1889년 12월 24일
"영국이나 러시아의 지배 아래 백성들은 여러 방면에서 고통이 없는 상황을 맞을 것이고, 여러 이득을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정황을 보건대 나는 러시아의 지배보다는 영국의 지배가 더 낫다고 본다." 1890년 5월 18일
일기에서 윤치호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이나 러시아보다 영국의 지배가 더 낫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윤치호는 왜 일본이나 러시아보다 '보다 멀고 이질적인' 영국의 통치를 바랐던 것일까. 그가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아서 그 이유를 특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의 일기 속에 드러난 영국에 대한 다양한 언급에 의거해 나름 '합리적인' 추측은 가능하다. 보다 분명한 이유는 영국은 이미 대제국으로서 (윤치호의 입장에서) 전세계의 미개한 국가들을 계명시킨 '선생 노릇'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바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치호가 생각하기에) 영국은 인도의 내란을 종식시켰다. 인도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했고, 학교를 설립해 인도를 교육했다. 달리 말해, 영국은 인도를 '개화'했다. 윤치호는 인도에 평화와 개화를 선사한 영국이 인도의 "은인"이라고 썼는데(1889.5.25), 분명 그는 이런 경험적 근거에 입각해 영국의 조선 지배를 염원했을 것이다. 영국도 조선의 선생, 조선의 은인이 될 수 있었다.
윤치호가 영국의 선정을 기대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일본이나 러시아와 달리 영국이 '합리적인' 제국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윤치호는 1883년 영국과 조선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영국의 공사 헨리 파크스(Henry Parkes)를 지켜보면서, 영국이 비록 오만한 강대국일지라도 조선이 원칙과 논리를 갖고 대응한다면 조선의 입장도 상당 부분 관철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1883.10.29; 1883.11.7). 또한 영국의 정치제도는 신뢰할 수 있었다. 윤치호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미국의 민주주의와 함께 높게 평가했는데(1893.9.24), 이 같은 선진적인 정치제도가 제국주의적 착취를 완화하거나 방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통치는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윤치호는 영국사를 공부한 뒤 영국사에서 가장 잔혹한 폭군이라고 불리는 제임스 1세마저 조선의 관리들보다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국 역사에서 가장 나쁜 시대의 가장 나쁜 군주들과 재판관들의 가장 나쁜 행위들이 인간성과 정의에 대해 내가 보고 읽은 조선 관리들의 불법적이고 사악하며 비인간적인 행위보다 더 나았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조선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반란자들에 대한 징벌을 보자. 반란 책임자는 모두 50여 명이었으나 죽은 사람은 수 천 명이었다. 제임스 왕의 신하들은 500명 이상 죽이지 않았다. 1685년 영국 반란자들의 부모들, 자식들 그리고 친척들은 단순히 반란자들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반란자들의 친척들이 사면되지 않았다." 1889년 12월 21일
윤치호는 영국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영국의 지배가 아무리 잔혹해질 지라도, 지금의 조선 정부만큼 인민들을 탄압하진 않으리라.
그렇다면 윤치호는 왜 '미국의 지배'는 언급하지 않았을까. 윤치호는 일본∙러시아∙영국의 지배 가능성은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그가 친히 유학했던 미국의 지배는 별도로 논하지 않았다. 윤치호에게 미국은 영국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정치적 선진국이었는데 말이다(1893.9.24). 추정건대, 이는 미국이 동아시아 패권에 영국만큼 절실한 혹은 현실적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힐러리 콘로이가 썼듯, 영국은 극동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고, 이런 맥락 속에 2년 동안 거문도를 강점하기도 했다. 즉, 영국은 조선에 개입할 전략적∙군사적 이해가 분명히 있었다. 반면 미국은 국내 문제에 더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으며, 영국만큼 동아시아 패권 확보에 사활을 걸 의지가 부족했다. 신미양요(1871년)는 미국에서 국가적·정치적 관심사로 확장되지 않았다. 윤치호는 미국이 영국만큼 조선에 개입할 현실적인 이유가 적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물론 윤치호가 무분별하게 영국을 칭송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영국의 노예무역이나 인도정복은 비난받아야 한다고 썼다. 그럼에도 윤치호가 영국의 지배를 높이 평가한 것은, 영국의 공과를 모두 고려할 경우, 공이 과를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영국의 공이 공이 된 이유는 부분적으론 식민지 때문이었다. 윤치호는 "만약 인도정부가 튼튼하여 능히 그 인민을 보호했다면 어찌 영국인이 횡행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쓰면서 영국은 잘 정돈된 인도가 아닌 혼란스러운 인도를 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바로 "이로 보면 영국이 인도를 차지한 일이 그를 것 없다."라고 결론을 내렸다(1889.5.25). 또한 윤치호는 "강함을 믿고 약자를 능멸하는 서양 정략이 옳지는 않으나, 아시아 여러 나라가 포악한 정치로 그 인민을 잔약하게 하여 외환을 스스로 청하는 허물을 어찌 면하겠는가?"라고 언급하면서 식민지의 식민지 됨, 혹은 영국의 공이 공이 된 것은 종국엔 '식민지의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렸다(1889.5.25). 윤치호가 보기에 제국에게 복속되기 이전 식민지는 결코 에덴동산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의 지배가 더 나을 정도로 군주는 폭정을 일삼고 인민은 억압받고 미개한 사회였다. 윤치호가 보기에, 그런 사회에서 제국의 지배는 (최선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대안'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영국의 지배는 '가장 매력적인 차선'이었다. 그는 영국의 인도 정책에 대해 "어떤 비난을 퍼부어도 좋"지만 바로 이어서 "나는 인도가 다른 나라의 통치 아래에 있는 것보다 영국 정부 아래 있는 것이 분명 더 낫"다고 단언했다(1889.12.24).
윤치호가 영국의 지배를 바랐던 것은 인도의 자리에 조선을 대입한 사고실험의 결과였을 뿐이다. 19세기 조선은 18세기 인도만큼 미개했을까. 윤치호가 보기엔 그러했다. 윤치호가 보기에 조선은 "무당이 내뱉는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이 위생학 관련 서적을 모두 구비한 완벽한 도서관보다도 더" 중시되는 "반미개국이었고(1897.11.11; 1902.10.6), 인민의 고충을 해소할 길이 없는 "무법천지의 나라"였으며(1895.8.5), "유교"의 폭정에 종속된 국가였다(1893.12.12; 1904.5.27). 즉, 조선의 문제는 결국 "일본도 아니고 러시아도 아닌 (...) 조선"이었다(1897.3.16). 영국은 이 구제불능의 미개국을 계명할 괜찮은 선생이 될 수 있었다. "영국이 인도를 비롯한 모든 식민지에서 학교 교장 노릇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1891.3.8). 다른 맥락이지만, 윤치호는 영국이 조선에 간섭하려 한다면 모두가 "쌍수를 들고 반길 것이다."라고 썼다(1897.11.11).
영국이 조선을 지해가면 어떻게 될까. 윤치호는 이런 사고실험에 착수할 때마다 분명 인도를 생각했겠지만, 어쩌면 '홍콩'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영국이 대표하는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의 매력 중 하나는 '자연을 정복하는 힘'이었다. 윤치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에게 바위를 주면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지브롤터로 만든다. 희망 없는 언덕들이 그들 손에 들어가면 홍콩 같은 곳이 된다. 그들을 신대륙의 숲이나 초원에 풀어 놓아 보라. 그러면 곧 그들은 제국과 공화국을 세운다. 굽이치는 바다가 물결치는 늪지와 저지대로 그들을 몰아내 보라.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 베니스, 홀랜드 또는 페테르부르크와 같은 도시를" 건설한다(1896.12.24). 윤치호는 어쩌면 "희망 없는 언덕"에서 중국 최대의 무역항을 건설했던 영국이 조선에서도 같은 일을 해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경제는 번영하고 인민들은 교육받아 차츰 독립을 준비하는 (다소 낭만적인) 단계로 나아가리라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윤치호는 인민들 옆에서 영국의 지배를 쌍수를 들고 반겼을 것이다.
영국은 오만한 제국이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윤치호도 그렇게 생각했다(1903.1.15; 1905.8.16). 하지만 그보다 못한 사회에 살던 사람들에겐, 적어도 윤치호에겐, 영국의 오만함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영국의 지배는 좋음이 나쁨보다 크고, 얻을 것이 잃을 것보다 큰 '대단히 유익한' 지배였다.
혹자는 본 연구에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다. (그 정도는 불분명하지만) 1883-1906년 윤치호의 영국 인식은 대체로 영국의 서적들과 기사들로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영국에 대한 윤치호의 긍정적 인식은 영국에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비판, 즉 '영국의 국내 담론을 수용한 결과'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윤치호가 영국에서 출판된 서적과 기사를 탐독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았다. 그는 현상 넘어의 본질을 볼 줄 아는, 적어도 보려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미국인들이 읊조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비웃었으며, 영국인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그들의 오만함을 직접 경험했다. 따라서 그의 영국 인식이 오로지 영국의 국내 담론을 수용한 결과라고 단정하긴 힘들다.
또한 그가 오직 영국에서 생산된 정보만 취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일본·중국·미국에서 생산된 기사나 서적을 두루 읽었다. 윤치호는 프랑스어도 구사했기 때문에 보다 '넓게' 읽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다. 게다가 윤치호 주변엔 '반영파'였던 독일인들이 존재했다. 달리 말해, 윤치호가 친영적 시각을 기계적으로 습득하고 재생산했을 가능성은 적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