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미커피 피베리님 인터뷰
Interviewee : 이미커피 서문원 @Peaberry
Josh(이하 J) 안녕하세요! 피베리님 어떻게 지내셨어요?
Peaberry(이하 P) 남구로 바(bar)는 잠시 영업을 쉬고 있어요. 요즘은 도소매 납품, 판매를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고요. 생산 효율에 특화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재배치 했습니다.
J 납품량이 많이 늘어서 로스터리로만 운영하시게 된 건가요?
P 겨울이 비수기라 생산량 자체는 줄었고요. 바를 동시에 운영을 하다보니 창고가 마땅치 않았어요. 생두 가격이 급격하게 오르는 거에 비해서 비용을 줄이는 방법은 많이 없더라고요. 저렴할 때 많이 사놓을 공간이 필요했어요. 더 공격적으로 납품도 늘려가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작업을 했다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J 얼른 바에서 다시 만나면 좋겠어요!
J 피베리(Peaberry)라는 닉네임은 어떻게 정하신 거예요?
P 제 특유의 찌질함에서 나온 이름이거든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는데, 바리스타라는 자부심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었어요. 노골적으로 바리스타 00은 싫었고요. 피베리가 커피콩의 한 종류인데 일반적으로 잘 모를 수 있는 용어예요. 그래서 일단 합격.
한편으로는 저의 소망이 담겨 있어요. 보통 커피 체리에서 씨앗이 두 개로 쪼개지는 게 일반적에요. 특이하게 씨앗이 하나인 걸 피베리라고 하죠. 예전에는 결점으로 취급했지만 지금은 00커피 피베리라고 하면 더 비싸게 팔리기도 해요. 그 가치를 나중에 인정받은 거죠. 지금은 볼품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중에는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는 의미를 끼워 넣었어요. 어쩌다 보니 닉네임으로 자리를 잡아서 사람들이 피베리라고 불러요. 누군가는 그것도 길었는지 베리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의미를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어요. 부끄럽네요.
J 저도 본명을 이번 카페쇼에서 처음 알았어요.
P 재밌더라고요. 아이디를 만들 때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게임 캐릭터 만들 때도 그랬고요. 만들어야 시작하는데 이름 정하는데 3일씩 걸리기도 했죠.(웃음) 닉네임에 의미를 많이 부여하는 편입니다. 피베리도 정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J 이미커피에 오면서 만든 건가요?
P 아니요. 아이디는 2017년에 제가 기억하기로 1월 1일에 만들었거든요.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쓰고 있어요.
J 피베리님은 커피를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P 처음에 흥미는 별로 없었었어요. 저한테 커피는 어릴 때 엄마가 커피믹스 드실 때 한 모금씩 뺏어먹거나 더위사냥, 커피우유같이 달콤하고 맛있는 거였죠. 제가 홍콩에서 호텔 경영학을 전공했거든요. 호텔 식음료 분야에서 인턴을 했는데 처음 커피 머신을 만져보고 에스프레소를 내려볼 수 있었어요. 그걸 하나의 기억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하고 취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전공을 살려 호텔에 취업을 해야 하나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돈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자존심 같은 게 있었어요. 난 뭘 하고 싶지? 뭐가 재밌었지? 생각하다가 인턴 때 내렸던 커피가 스치더라고요. 한 번 도전해보자는 마음에 이태원의 모 카페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요. 서울역 근처 카페에서 1년 정도 근무했고요. 포비를 거쳐 여기까지 왔네요.
J 처음부터 스페셜티 커피 업계에서 일하신 건 아니었네요.
P 그렇죠. 저는 커피를 내리는 게 재밌다는 단순한 기억 하나로 시작했습니다. 정말 어줍지 않은 라떼아트 그려가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원리도 모르지만 내가 만들었구나 하며 좋아했어요. 직접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흥미를 가졌던 것 같아요. 여전히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내리는 걸 좋아해요. 한동안 바리스타는 나의 천직이다 생각했죠. 내가 마실 필요는 없고 남에게 주면 되니까요.(웃음)
J 포비 단골손님에서 직원이 되셨다고 봤어요. 어떤 매력을 느끼셨나요?
P 서울역 카페에서 일하면서 한참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나는 정말 한 5분, 10분만 가르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지속하기 어렵겠다 생각했죠. 조금만 걸어가면 광화문이었는데 지나가다 우연히 포비에 방문했어요. 나도 바리스타고 거기서 일하는 분들도 바리스타인데 너무 다르게 느껴지는 거예요. 흰 와이셔츠에 갈색 가죽 앞치마 입고 일하는 모습도 멋있었고요. 저울로 계량하고 섬세하게 컨트롤 모습에 전문적인 느낌을 받았어요. 제 커피는 담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말이죠. 정말 멋있다, 잘한다 생각했어요. 만약 마지막으로 카페에서 일할 기회가 있다면 여기서 하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땐 포비라는 이미지가 저한테는 정말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렇게 3~4개월 퇴근하고 방문해서 커피를 한 잔씩 마셨어요. 창가 자리는 보통 바깥을 보고 앉잖아요. 저는 굳이 돌아서 바를 응시했어요. 저 사람들은 나랑 뭐가 다를까? 아마 비슷한 급여를 받으면서 일할 텐데 왜 전문적이고 멋있어 보일까? 몇 달 동안 바라봤어요. 나중엔 여기서 일하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어요. 어차피 그만둘 거 도전이라도 해보자 마음먹고 당시 매니저에게 물어보고 지원했어요. 그전까지 일을 오래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내가 과연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자존감 낮은 사람이었어요. 스스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뿌듯했어요.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한 것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면접과 결과를 기다렸고 합격했습니다. 태어나서 가장 기뻤던 날 중에 하나였던 것 같아요. 단순히 놀고 즐기기 위함이 아닌 커리어를 위해 욕심내고 이루었다는 쾌감, 그렇게 동경만 하던 곳에 설 수 있다는 사실에 벅찼어요. 출근할 때마다 무대에 서는 마음이었어요. 퇴근하면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좋았던 것 같아요.
J 살면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건 특별한 경험일 것 같아요.
P 단순하게 그 순간의 즐거움과 내가 멋있어 보인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바에 있으면 왠지 모를 아우라가 저한테 씌워지는 것 같았죠. 약간 허세도 부리고 멋있는 척도 하고 그랬었어요. 남들은 어떻게 봤을지 모르겠지만요.(웃음) 결국은 멋있어서 했던 것 같네요. 내가 만든 커피에 근거가 생기면서 자부심도 느꼈어요. 스스로 원했던 전문성을 가져가고 있구나 생각하며 기쁘게 일했습니다.
J 포비에서는 얼마나 일하셨죠?
P 2년 7개월이요.
J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기억에 남거나 인상 깊었던 일이 있나요?
P 제가 에스프레소 추출을 담당했던 주말이었는데요. 퇴근하고 인스타그램을 봤는데 어떤 손님께서 그날 커피에 대한 혹평을 올리셨어요. 담뱃재가 들어간 맛이 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강도 높은 혹평에 화가 났지만 어떻게 반박은 못하겠는 거예요. 저 스스로도 근거가 없었으니까요. 한동안 힘들었지만 하나의 계기가 되었어요. ‘다시는 누군가 내 커피를 마시고 이런 말을 못 하도록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 열심히가 아니라 잘해야겠다.’ 그때를 기점으로 커피에 빠지게 된거예요. 커피 스킬과 이론을 공부하고 블랙워터슈에서 자료를 찾아봤어요. 시간 날 때 혼자 여러가지 테스트도 하면서 커피에 한창 깊게 빠졌죠.
J 이미커피도 손님으로 먼저 오신 거예요?
P 한창 카페를 많이 다니던 때였어요. 그때는 예약제가 아니라 워크인으로 방문할 수 있었는데요. 사장님 혼자 운영하셨어요. 충격적이라 할 정도로 새로웠어요. 2시쯤이었나? 바로 옆자리에 40,50대로 보이는 중년 신사께서 커피와 디저트를 드시고 있었어요. 일단 그 모습이 너무 새로웠습니당. 고독한 미식가 같은 느낌. 정장 차림으로 커피 한 잔과 디저트를 음미하고 가시는 걸 보면서 여기는 미식을 즐길 줄 아는 분들이 오는 곳이구나 생각했죠. 마치 파인 다이닝 식당 같은 느낌이랄까요. 일단 맛도 훌륭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식기, 노래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카페에서 대접받는 기분을 처음 느꼈죠. 사장님이랑 대화하면서 "음 세미나"를 알게 됐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참석했어요.
J 음 세미나가 있다고만 들어봤는데 어떠셨어요?
P 사장님과 최이사님께서 진행하셨고요. 7,8명 정도 모였던 것 같아요. 정확히 2019년 10월 20 일요일. 세미나를 들으면서 이미 커피의 철학을 알 수 있었어요. 여기 매력있다. 나도 커피를 주제로 뭔가 한다면 이런 느낌이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종종 방문하면서 사장님과 안면도 생겼고요. 나중에 바리스타 구인할 때 한 번 지원해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J 사장님께서도 피베리님을 좋게 보셨나 보네요.
P 자리가 오픈될 거라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전 직장은 나름 안정적으로 다니고 있었고요. 이미커피를 동경하고 세미나를 통해서 "다름"이란 걸 많이 느끼고 있었어요. 그 바에 서고 싶기도 했고요. 이미의 바는 오롯이 한 명의 바리스타가 소수의 손님들을 상대해요. 바리스타로서 정말 한 번은 서보고 싶은 무대라고 생각하거든요. 포비에서도 그랬고 바 사이에 손님과 대화하고 서비스하면서 성취감을 많이 느꼈었어요. 이미커피는 제가 좋아하는 걸 극대화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죠. 고민하다 결국 지원했어요.
저는 어디에 지원할 때 모르는 곳에는 하지 않아요. 그 회사에 애정이 있어야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일하는 모습이 어느 정도 상상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포비 때도 창가 자리에 앉아서 몇 개월간 상상한 거죠. 이미에서도 잘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사장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디테일에 민감한 편이예요. 예를들어 컵을 드릴 때 정확히 손잡이를 손님이 잡기 편하게 놓아요. 컵을 올려두는 종이를 코스터라고 하죠. 코스터에 로고가 항상 손님을 향하도록 했어요. 약간 강박증 같지만 습관이 되니까 편하더라고요. 그렇게 되어있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했어요. 이런 부분을 사장님께 어필했어요. 이 정도 규모는 내 방식대로 마음껏 일할수 있겠다 생각도 들었고요.
J 맞아요. 사장님 글에서 봤는데 "줄 맞추는 걸 좋아한다" 쓰셨다고.
P 줄 맞추는 걸 선호하고 잘할 수 있다, 여기서 사장님이 하시던 것들 다 할 수 있다 어필했어요. 감사하게도 면접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말하기 뭐 하지만 지원자가 꽤 상당했던 걸로 알고 있거든요. 한 150명 넘었다고 들었어요. 물론 실제로 면접을 본 사람들은 많지 않다고 하셨지만 제가 선택되어서 얼떨떨했죠.
J 인터뷰에서 기억 남는 게 있다면요?
P 그때 주셨던 커피가 정말 인상 깊었어요. 코스타리카 펠라 네그라였거든요. 아이스로 내려 주셨는데 정말 포도같이 달콤하고 맛있었어요. 저는 면접하면 그 커피밖에 기억이 안 나요. 긴장도 많이 해서 그럴까요? 꽤 오래 대화한 것 같은데 왜 기억이 안 나네요.
J 피베리님도 그렇고, 사장님이 이미커피와 결이 잘 맞는 분들을 뽑으신 것 같아요.
P 사장님이 가지고 있는 섬세한 결이 있어요. 절대 마초적이지 않으시죠. 물론 일하실 때는 정확하게 하시지만, 매장에서의 모습은 정말 부드럽고 자상하세요. 그 결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유들유들한 사람들을 많이 채용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J 사장님이 포지션을 그대로 이어가시는 게 부담도 되었을 것 같은데요.
P 사장님 혼자 운영하던 바를 처음으로 내어주신 거라 부담이 컸어요. 커피도 커피지만 사장님이 손님들을 케어하고 응대하는 모습이 굉장히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단순히 커피와 티저트뿐만 아니라, 사장님과 대화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다고 느꼈어요. 그에 비해 저는 낯도 많이 가리기도 했고요. 다양한 주제를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의 폭이 넓지 않아서 어려웠어요. 자주 오시던 분들은 우스갯소리로 얼마나 잘하나 보러 왔다 얘기하셔서 많이 떨었죠. 누군가 자리매김하고 있는 곳에서 같은 일을 할 때는 많은 평가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아주 간단히 커피가 맛없더라든지 아니면 예전처럼 사근사근하지 않더라 피드백이 들릴까 부담스러웠어요.
J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P 맞아요. 처음엔 대화가 단답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스스로 미션을 세웠어요. 최소 몇 명에게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물어보거나, 조금 더 친근한 질문을 던져보려고 노력했죠. 예전부터 관찰하는 걸 좋아했어요. 관찰하고 적절하게 미리 캐치해서 반응하는 것에 희열이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 손님이 특정 브랜드 옷을 입고 오시면 그 옷에 대해 물어본다거나 두리번두리번하실 때는 미리 물 한 잔 준다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챙겨드리려고 노력했어요.
성격도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고요. 조금 더 프라이빗한 느낌을 많이 느끼셨으면 했어요. 그냥 먹고 가는 게 아니라, 정말 나를 신경 쓰는구나 느끼셨으면 했죠. 효율과는 아주 동떨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비효율의 끝판왕이라고 할 정도로요. 커피 한 잔 내리는데 10분씩 걸려요. 옆에서 똑같은 메뉴를 주문해도 또 설명해 드립니다. 손님들은 빠른 서비스가 아니라 여기만의 분위기를 느끼러 오신 거라 생각했어요. 일부러 페이스 조절도 하고 느리더라도 여유 있는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J 맞아요. 저도 여기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러 왔던 것 같아요. 제가 처음 왔을 때 피베리님이 로스터셨는데요. 로스팅은 어떻게 시작하신 거예요?
P 여기서 로스팅을 하시던 분께서 다른 곳으로 가시면서 저한테 선택권이 주어졌어요. 업계에서 로스터 자리가 쉽게 열리지 않거든요. 포비도 지점이 많고 크지만 로스팅은 2명이서 해요. 바에 서고 싶은 마음이 크기도 했지만 주변 모두가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고 했어요. 사장님께서도 이렇게 다양한 커피를 볶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을 거라고 하셨고요. 정말 경력 많은 분의 자리를 대체하는 거라 무던한 노력이 필요했어요. 새로운 시도에 부담감도 컸지만 하기로 결정했어요. 짧은 인수인계 기간 동안 노하우를 전수받았지만 어깨가 무거웠어요. 내 실수로 많은 업체들이 맛없는 커피를 팔게 될 수도 있고, 매번 새롭고 번뜩이는 커피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요. 큰 도전에 의미를 두고 시작했어요.
J 로스팅이 처음이다 보니 역시나 부담이 안 될 수가 없었겠어요.
P 이카와 샘플 로스터기를 구매해서 볶아 본 경험 말고는 전혀 없었어요. 어깨너머로 배운 건 있었는데 직업으로 삼는다는 생각을 못 해봤거든요. 그래도 로스터라는 직업에 동경은 가지고 있었어요. 저는 뭐든 동경을 쫓아간 것 같네요. 포비라는 회사에 대한 동경, 이미에 대한 동경, 로스터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 특정 부분에서 보수적인 편인 것 같아요. 무슨 뜻이냐면 새로운 것에 두려움이 많고 하던 것, 익숙한 걸 좋아해요. 영화도 본 걸 또 보고, 카페도 갔던데 또 가고, 먹는 것도 먹던 걸 좋아해요. 작년에는 스스로를 던져보는 도전을 많이 했던 것 같네요. 물론 제가 지금은 로스팅을 하지 않고 있지만요. 해도 안 해도 후회하겠지만 알고 모르고 차이가 생기니까 어떤지 한번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J 로스팅은 잘 맞으셨나요?
P 처음에는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이과는 아니지만 수치적으로 접근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커피 내릴 땐 농도 체크하는 걸 좋아했고요. 로스팅은 그래프 보면서 체크하는 비슷한 점이 있어요. 잘 맞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들 그러잖아요. 로스터는 고독한 직업이라고. 혼자 기계 앞에 있는 게 힘들었어요.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확신이 잘 안 섰고요. 종종 전에 계셨던 로스터님에게 커피 샘플 보내서 맛봐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제가 있는 동안 납품량이 시작할 때보다 한 4배 정도 늘었어요. 물리적인 한계도 느끼고 있었죠. 매번 새로운 커피를 찾아야 하는 부담감, 날씨 변화로 잡히지 않는 미묘한 차이를 컨트롤하는 게 버거웠어요. 그리고 멈출 수 없는 굴레에 들어갔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J 맞아요. 납품을 해야 하니까요.
P 내가 쉬면 많은 거래처가 타격을 입겠구나. 재미도 여유가 있어야 생기는데 물량 쳐내기 바빴어요. 테스트해 볼 겨를도 없었죠. 로스팅하면서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단 걸 깨달았어요. 커피 내리는 것과 결과물을 체크하는 걸 좋아했구나. 커피 그 자체에 호감도는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더라고요. 예를 들어 전 로스터분은 새로운 커피를 볶는 게 너무 설렌다고 했어요. 비싼 게이샤를 볶는 게 너무 즐겁고 무슨 맛이 날까 궁금하다고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해야 하는 일이 돼버리니까 단순 노동이 되는 것 같았어요.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필요하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제가 밖과 안의 일을 다 해본 사람이니까 매니징을 하면 어떻냐 사장님이 제안 하셨어요. 마침 바에 계셨던 분께서는 로스팅 경험도 있으시고 하고 싶어 하셔서 스위치가 되었죠.
J 새로운 포지션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P 기획자라고 딱 말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로스터리 매니저, 마케터도 아니고요. 브랜드 매니저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것 같아요. 지금 하는 일은 프로덕트 매니저에 가까운데 뭐라고 부를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커피의 00입니다 소개할 수 있는 명확한 단어는 고민 중입니다.
J 어떤 일을 주로 하고 계신가요?
P 지금은 스마트 스토어를 활성화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오프라인에 강점이 있지만 매장 한 곳은 잠시 쉬고 있고 오프라인 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원두 생산과 납품은 저희 주 수입원 중 하나예요. 스마트 스토어를 조금 더 매끄럽고 효율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느끼는 이미스러움이라고 하는 디테일과 적극적으로 경험을 제안하는 걸 어떻게 온라인에서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온라인에서 구매한 원두를 받았을 때 어떻게 이미스럽다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고요. 일부러 다른 로스터리의 원두를 택배로 배송받아보면서 참고하고 있어요. 분쇄도 샘플을 만들기도 하고요. 생각보다 많은 업체에서 하고 있지 않더라고요. 분쇄도 샘플과 간단한 레시피를 첨부하면 적어도 맛적인 경험에서는 오프라인과 비슷하게 느낄 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도매 납품도 스마트 스토어를 통해 주문할 수 있게 바꿨고요. 콜드브루나 드립백 등 다른 구성도 갖춰 나갈 예정입니다.
J 업무가 바뀌면서 처음 맡으신 게 카페쇼였죠?
P 걱정이 많았어요. 카페쇼가 11월 초였고요. 저는 9월까지 로스팅하고 10월부터 업무가 바뀌었어요. 거의 한 달 정도 바 업무와 병행했죠. 바에서 일을 오래 했었지만 다시 돌아오니까 체력적으로 힘들더라고요. 새로운 일은 익숙하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최이사님이 그러셨거든요. 기획은 갑자기 번뜩이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거라고요.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하루, 이틀씩 앉아서 일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재작년에 참가했던 기억들을 떠올려보면서 사장님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카페쇼에 참가하는 목적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알리는 거예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차별됨을 보여주는 거잖아요. 이번 커피 앨리에 32 업체가 참가했어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스가 되는 게 목표였어요. 어떻게 차별을 줄 수 있을까 고민했고 새로운 블렌드를 만들게 됐어요. 사실 카페쇼가 뻔하기도 하거든요. 다른 회사들도 가장 좋고 자신 있는 커피를 선보이려고 할거에요. 많은 게이샤와 비싼 커피들이 나올거고요. 우리는 특색 있고 뚜렷한 향이 있는 커피, 복합적인 것보다 누구나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블렌드를 만들자 정했어요. 종류도 많을 필요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싱글 커피를 들고나가지 않기로 결정을 하고 모든 커피를 블렌딩을 했어요. 로스터 분이 고생을 많이 했죠.
J 카페쇼 준비과정도 궁금해요.
P 카페쇼 한 달 전에 시작해서 샘플링을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어요. 가지고 있는 커피를 잘 조합해보자는 취지가 컸어요. 비율이 안 맞아서, 두 커피가 안 어울려서 버린 것도 정말 많았어요. 준비하면서 딸기맛 초콜릿, 로즈마리 청사과 시나몬 초콜릿 세 가지로 추려졌죠. 가지고 있던 생두로만 블렌딩을 하다 보니까 양이 넉넉하지 않았었거든요. 로즈마리 청사과 블렌드는 조기에 소진되었어요. 저희는 항상 조금 비밀스럽잖아요. 이 매장이 있었을 때도 디저트를 공개하지 않았죠. 그 무드를 가져가고 싶었어요. 사장님의 아이디어인데 부스를 가려서 하나의 방처럼 만드려 했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늑함이나 프라이빗한 느낌으로 차별할 수 있겠다 생각을 했어요.
P 부스 내부에서 시음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고 다 엎어졌죠. 저희는 소비자와 소통을 중요한 가치로 여겨요. 코로나로 시음 장소가 생기면서 세컨 터치를 만들 수 없게 되었죠. 소비자가 음료만 마시고 끝나는 경험은 반쪽짜리라고 생각했어요. 소통하면서 경험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고요. 시음존에서 음용 후 다시 돌아오게 할 방법이 필요했어요. 스티커가 떠올랐고 우리 커피 맛에 공감하시면 돌아와서 스티커를 붙여달라고 했어요. 돌아오실 때 소통하면서 여러 가지 피드백을 많이 받을 수 있었어요. 스티커가 쌓이면서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기도 했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우리만의 차별성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공감의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것에 뿌듯했습니다. 제가 스티커를 3천 장 준비했는데 열몇 장 정도 남기고 다 사용했어요. 적어도 2천 명 이상의 공감을 받은 거죠. 돈을 많이 번 건 아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 받고 있구나 알 수 있었어요.
J 저도 확실히 다른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이미스럽게 잘하신 것 같아요.
P 회의도 정말 많이 했거든요. 네이밍부터 여러 가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희는 직관적인 맛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매장에서도 항상 고민하는 부분인데요. 커피를 어렵게 인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산미있는 커피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떻게 좋게 느낄 수 있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커피는 기호 식품이고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달라요. 학습적으로 늘 수밖에 없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커피 경험이 많지 않은 분에게 학습이 필요한 커피를 드리면 전달되지 않겠죠. 나는 잘 모르는구나 위축될 수도 있고요.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면서 만들었고요. 이름에서도 복잡하고 추상적인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어요. 긴 설명 필요없이 간단명료 하면서 확 와닿을 수 있도록 볼드한 글씨체를 사용했어요.
J 글씨체 아주 공감합니다.
P 멀리서 봐도 알 수 있게 정말 볼드한 글씨체를 사용했어요. 색상도 각 커피가 가진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디테일한 장치를 많이 만드려고 했어요. 많은 테스트를 거쳐 비슷한 향이 날 수 있도록 준비했고요. 저희는 조금 더 쉽게 느낄 수 있게 가이드 역할을 했어요. 실제로 커피를 제공할 때 이런 맛이 납니다 설명해드리면 더욱 쉽게 느끼시더라고요. 많은 고민이 들어간 결과물이었어요.
J 새로운 블렌드는 카페쇼도 그렇고 온라인에서도 반응이 좋습니다.
P 네 맞습니다. 카페쇼가 가장 큰 행사다 보니 저희를 경험하셨던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입소문도 많이 탄 것 같기도 하고요. 감사하게도 인스타그램에 올릴 때마다 금방 매진됩니다. 매번 최대한으로 생산하지만 빠르게 매진되는 걸 보면서 꽤 좋은 인상을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구분되고 기억에 남는 업체가 되자는 목표가 잘 이루어진 것 같아요.
J 첫 번째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되었네요.
P 감사하죠.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기대와 반응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끝나고 나서 며칠 동안 알아 누웠습니다.(웃음)
J 새로운 업무를 위해 노력하시는 게 있다면요?
P 기획자의 습관과 생각 정리 스킬이라는 책을 구매했어요. 제가 계획적이지 못하고 결정도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빠른 결정을 내리고 일을 진행해야 하는 포지션이거든요. 어떻게 일해야 하나 참고하고 있고요. 또 퍼블리라는 플랫폼을 구독하고 있어요. 일주일 정도 됐고요. 아직 많이는 보지 못했지만 돈 들여 투자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사무직으로 일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게 많아요. 하나의 프로젝트에서 사전 준비, 진행, 보고, 피드백은 어떻게 하는지 잘 잡혀 있지 않아서 중구난방으로 일을 하고 있거든요. 도움을 받고자 구독했습니다. 생각보다 잘 보고 있지 않아서 루틴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정말 도움이 될 게 많다고 보거든요. 많이 필요로 하고 있고요. 제대로 하고 있는지 기준이 없다는 불안함을 느끼고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 생각을 종종 해요. 제 포지션이 원래 있는 회사도 아니었고 오프라인 카페 업 중심이라 아주 쉽게 녹아들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J 그래도 이미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있으니까 어느 정도 가이드 역할을 해줄 것 같아요.
P 맞아요. 사람들이 바라보는 이미의 이미지는 어떨까? 거기에 부합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까 생각하려고 해요.
J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으시다면,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P 저는 후지 필름을 좋아합니다. 회사가 정말 독특한데요. 필름 베이스에 카메라를 생산해요. 보통 카메라 회사는 큰 사이즈 센서에 집착하죠. 센서가 클수록 더 선명한 화질과 좋은 퀄리티 사진을 낼 수 있거든요. 후지 필름도 물론 큰 센서의 카메라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산하는 카메라들은 작은 센서를 사용해요. 이해할 수 없는 거죠. 왜 작은 센서를 만들까? 필름 카메라를 모티브로 19년 말에 나온 카메라가 있어요. 액정이 숨어 있죠. 필름 카메라는 찍고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없어요. 현상해야만 볼 수 있는 특징이 있죠. 디지털에서 비슷하게 구현하기 위해 일부러 번거롭게 만들었어요.
절대 많이 팔릴 수 있는 카메라는 아니고 매니아틱한 제품이거든요. 손해를 볼 수 있지만 하고 싶은 걸 한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어요. 저는 그 카메라가 갖고 싶을 정도로 매력을 느꼈고요. 필름 카메라는 정말 찍는 순간에 집중하게 돼요. 조마조마 마음으로 확인하는 매력이 있죠. 디지털은 바로 확인할 수 있어서 찍는 순간의 소중함이 적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 행보가 저는 멋있더라고요. 여기도 저기도 잘하니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 필름에서 시작된 걸 보여주듯이 카메라 디자인도 레트로한 편입니다. 실제로 후지 필름은 레트로한 필터를 잘 만들어요. 후지 카메라를 쓰는 사람들만의 느낌이 있죠.
J 들으면서 이미커피가 떠올랐어요.
P 맞아요. 팬들이 있고 여기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어요. 후지 필름도 감성적인 측면에서 제공하려는 시도들이 많죠. 다른 카메라로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고요. 더 좋은 커피, 더 맛있는 커피 만드는 곳은 많겠지만 저희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함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후지 필름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 같네요. 제가 회사를 너무 좋아하는 만큼요.
J 알겠습니다. 금방 한 달이 지나긴 했는데 2022년 목표가 있으신가요?
P 뭘 이루겠다고 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을 하고요. 이 일을 지속하는 것과 익숙하게 일할 수 있는 마인드셋, 사고방식을 갖추는 게 목표입니다. 구상 중인 프로젝트가 몇 가지 있고요. 지금 하는 것들을 잘할 수 있는 게 목표예요.
J 앞으로는 확장된 영역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요?
P 로스터리 내부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은 외부 행사들도 해볼 수 있겠죠. 예를 들어 홍대 매장은 월요일, 화요일 휴무라 비어 있어요. 그때를 활용해 팝업을 진행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년 페어링 라떼를 출시했을 때 시음했던 것처럼요. 새로운 원두를 개발했을 때 시음하고 원두도 팔면 재밌을 것 같아요. 물론 수많은 준비들이 필요하겠지만요.
J 이제는 조금 개인적인 질문들인데요. 일반인이시지만 사진을 정말 잘 찍으신다고 생각해요.
P 고등학생 때부터 사진에 대한 로망은 항상 있었어요. 카메라가 고가라서 제대로 써볼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요. 2017년 중반에 필름 카메라를 한대 사면서 빠진 것 같아요. 유행하기 전인데 왜 필름 카메라를 샀는지는 모르겠네요. 서울역 근처에서 근무해서 바로 옆이 남대문이었어요. 중고 카메라 업체들이 많아요. 한 20만 원 주고 필름 카메라 샀어요. 내가 의도하고 찍은 것이 하나의 결과물로 나오는 게 재밌더라고요. 허세 같지만 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요. 매 순간은 그냥 지나가잖아요. 모든 건 다 찰나인데 담아내죠.
내 사진은 누구 것과도 같을 수 없어요.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도 있겠다 생각이 많이 들었었어요. 물론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고 그땐 찍는 게 재밌었어요. 현상을 맡기면 2주씩 걸렸거든요. 바로 확인도 안 돼서 답답했지만 정말 설레었죠. 그런 불편함이 매력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는 과정보다 결과물에 집착을 하게 됐어요. 그 시기에 마침 필름 가격이 많이 올라서 지속하기에는 비싼 취미가 되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필름 느낌이 많이 날 수 있는 카메라를 찾다 보니 후지 필름을 골랐어요. 종종 사진 잘 찍는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신감도 생겼어요. 이제는 인스타그램에 모든 사진을 카메라로만 찍어서 올리게 되었죠. 저만의 보정을 거쳐서 올려요. 유일한 취미 같은 거예요. 좋아요 받으면서 기뻐하고요.(웃음)
J 사진 찍으실 때 기준이 있나요?
P 딱히 없고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닙니다.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어서 보통은 지나가다가 예쁘면 찍어요. 많이 찍을 때도 있고요.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하루 종일 무겁게 돌아다니기만 할 때도 있어요. 하나의 취미가 되면서 사진을 찍고 돌아다닐 때 쉰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아요.
J 보정하신다고 했는데 어떤 느낌을 주려고 하시는 거예요.
P 감성이라는 단어가 가진 모호함이 잘 와닿지 않거든요. 감성보다는 필름에서 느껴지는 거칠지만 따뜻한 질감을 추구하고 있어요. 또렷한 사진보다는 조금 뭉개지는 게 마음에 들어요. 밝은 것보다는 일부러 어둡게 보정하는 경향도 있어요. 제가 봤을 때 좋은 게 좋아요. 표현하기는 어렵긴 한데 그래서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요.
J 피베리님 자신의 느낌이 묻어나는 그런 거겠죠?
P 네. 맞습니다.
J 올림픽 공원 나홀로 나무를 매년 찍으러 가신다고 봤는데 흥미롭네요.
P 누군가 그 사진을 찍어서 올렸는데 너무 멋있었어요. 저도 찍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2018년에 처음 갔어요. 피사체를 찍으러 갔던 게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결과물도 정말 마음에 들었고요. 벌판에 브로콜리 같은 나무 한 그루.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고 하염없이 서서 봤어요. 첫 기억이 좋았는지 루틴처럼 꼭 3월에 가게 되더라고요. 가서 뭔가 의식을 치르듯이 한 해 동안 잘 지냈니? 물어보고 사진을 찍고 와요. 거창한 생각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겠다는 건 아닌데 3월이 되니까 또 생각이 나더라고요. '1년 동안 여기서 버티고 있었구나, 나도 한 해를 잘 보냈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해요. 언제는 부목이 설치되어 있더라고요. 한 해 동안 많은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고 나름대로 그 모습을 여러 구도로 담았어요. 매해 나무가 변해가는 모습을 찍는 것이 하나의 프로젝트가 된 거죠. 공교롭게 3월이 봄의 시작이니까 뭔가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돌아보는 것 같기도 해요. 다다음달에 또 갈 예정입니다.
J 자기만의 스토리를 가진 대상이 있다는 게 정말 좋은데요.
P 인스타그램으로 활동하시는 제가 좋아하는 스냅 작가님이 계시는데요. 그분은 에펠탑을 굉장히 많이 찍으시고 파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거의 7-8할이 에펠탑 사진인 것 같아요. 그분 사진은 애정이 묻어 있고 똑같은 에펠탑 같은데 본인만의 스토리가 항상 있어요. 그 작가님을 의식하고 시작한 건 아닌데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매해 생각나고 또 사진에 잘 담겨요. 그냥 스마트폰으로 찍으셔도 예쁘게 담길 거예요. 윈도우 xp 바탕화면 같은 느낌도 많이 들고요.
J 저번에 재밌었던 게 손님들이 피베리님을 "아~ 그 파스타 좋아하시는 분" 하시더라고요.
P 정말요?
J 그때 로스팅하시면서 바에 없을 때 일거예요. 몇몇 분은 피베리님을 그렇게 부르시더라고요.
P 원래 면을 좋아하긴 하는데 파스타 좋아하죠. 토마토 스파게티, 크림 스파게티 밖에 몰랐다가 오일 파스타 좋아하게 됐어요. 실제로 할 줄 아는 음식이 알리오 올리오 밖에 없습니다. 한식보다 양식을 선호하고요. 우연한 기회로 파스타집 가서 오일 파스타를 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엄마한테 죄송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고 말할 정도로요. 저는 음식에 대한 욕심이 없는 편인데 그 집 파스타는 식사를 하고 가도 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있었죠. 최근에도 갔다 왔어요.
알리오 올리오를 맛있게 만들고 싶어서 연구도 많이 했어요. 매번 먹을 때마다 테스트도 하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저만의 레시피를 설정해놨는데 치킨 스톡에 다 끝나더라고요. 청정원에서 나온 셰프의 치킨 스톡이 있어요. 5에서 10g 정도 넣어서 먹으면 감칠맛이 살아나요. 내 모든 노력들이 무의미로 변하는구나 경험도 했죠. 나중에 제가 직접 치킨 스톡을 끓여서 파스타를 만들고 싶어요. 다른 걸 할 때도 0에서 100까지 오로지 제 손을 거쳐 성취하는 거에 욕심내는 편이에요. 지금은 시중에 판매하는 치킨 스톡에 굴복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내가 직접 치킨 스톡까지 만들어서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겠다는 소소한 꿈이 있습니다.
J 그 집 파스타는 어떻게 다른가요?
P 저한테는 정말 너무 맛있어요. 면이 언뜻 보기에는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요. 가지고 있는 특유의 꾸덕함과 알단테라고 하죠. 파스타가 씹히는 식감과 혀에 달라붙는 촉감까지 너무 완벽한 맛을 가지고 있어요. 계속 먹게 되는 단짠, 아마 치킨 스톡에서 나온 거겠죠. 나도 그런 파스타를 만들고 싶다 생각이 들 정도예요.
J 어딘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P 공개 안 하면 안 될까요? 사람 많아질까봐요.(웃음)
J 비공개로 하겠습니다. 저만 알려주세요.
P 저한테 제일 맛있는 맛이에요. 더 비싼 파스타 집도 방문해 봤는데 첫 충격때문인지 여기가 제일 좋아요. 2018년에 처음 갔으니까 거의 5년째 방문하고 있어요. 인생 파스타뿐만 아니라 인생 음식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내가 먹는 거에 설레기도 하는구나 느꼈어요.
J 보통 쉬실 때는 어떻게 쉬시나요?
P 명확한 답변을 드리기 어려운 질문이에요. 쉼에 관한 글을 인스타그램에 쓰려다가 말았거든요. 쉬는 법을 정말 모른다고 생각 했어요. 실제로 쉬지 않고 일하기도 했고요. 2016년 말 취업한 이후로 한 번도 텀없이 이직을 했어요. 포비에서 2년 7개월, 7월 31일까지 근무하고 8월 1일부터 여기서 일을 했어요. 5-6년을 쉬지 않고 일하다 보니까 쉬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한때는 일하는 게 너무 재밌고 좋으니까 쉬지 않아도 좋다 생각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연히 지칠 수 있잖아요. 휴무가 있어도 뭘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날려버리기도 허다했죠. 주기적으로 휴무는 있으니까 쉰다고 생각했어요. 몸은 누워서 편하게 쉴 수는 있지만 쉰다는 느낌은 잘 못 받았던 것 같아요.
결국 내가 정말 만족을 느낄만한 행동을 온전히 나를 위해 하는 게 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쉬지 못하고 있었구나, 뭘 해야 될지 모르는 상태로 시간을 낭비만 하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쉬는 방법을 찾는 게 올해 목표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업무 자체가 삶이랑 섞여 있어요. 쉬는 날 카페를 가도 그냥 편안하게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에요. 여기는 왜 잘될까? 사람들은 왜 다시 올까? 고민하게 되는 거죠. 이건 쉬는 건가? 일을 하는 건가? 경계가 없어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바에서 근무할 때는 집에 가면 분리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뭘 할 때 쉼을 느끼는지 알아서 의도적으로 끊어낼 필요가 있겠다 생각합니다. 돌아보니까 일을 잘하기 위해서 노력했지 내가 내 삶을 잘 살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고요. 쉴 때도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한테 인정받을까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J 쉼에 대한 질문은 매번 하고 있는데요. 앞서 인터뷰하신 두 분은 혼자서 카페를 운영하시죠. 일 자체를 즐기는 형태로 가시기도 하더라고요. 정의는 사람마다 굉장히 다른 것 같습니다.
P 저도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거든요. 삶의 반 이상을 일 할 텐데 고되고 힘들어서야 삶을 영유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제가 커피 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약간 비관적인 편이긴 하거든요. 창업을 하지 않으면 한계가 명확할 수 있다고 보고요. 육체적인 노동이 많이 따르기도 하고 보수가 많이 올라가는 직업은 아니잖아요. 단순히 즐길 수 있는 일만 해선 안 된다 생각이 들어서 다양한 걸 해보려고 해요. 약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새로운 환경에 노출시키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고통스럽죠. 자존감도 낮은데 잘 못해서요. 당연히 처음엔 못할 수밖에 없잖아요. 단기간에 잘하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죠. 항상 쉬운 일만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실패를 두려워해서 당연히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일들만 했던 것 같아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일들만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가끔 늦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해볼 수 있는 기회들이 있으니까 부딪혀보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답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얘기가 무거워졌네요.
J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P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야 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여전히 저에 대해 모르거든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파스타 말고는 잘 모르겠고요. 성격 상 눈치를 많이 봐서 다른 사람 주장을 많이 따르는 편이기도 하고요. 저의 의견을 내세우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아쉬워할 만한 여지를 주는 게 너무 불편해요. 심지어 누군가가 저에게 잘못을 해서 미안해하는 걸 보는 것도 너무 힘든 성격이에요. 항상 참고 맞춰주는 게 익숙해서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단순히 사진을 좋아하긴 하는데 정말인가 생각도 들고요. 몰라서 사진이라도 찍는 건 아닌가 싶어요. 간단한 질문일 수 있지만 쉼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해소가 안 되니까 쉬어도 더 쉬고 싶죠. 결국 못 쉬었으니까요.
J 올해는 꼭 찾으시길 바라겠고 저도 더 많은 걸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P 소비에서도 그래요. 경험적인 것에 대한 소비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어요. 비싼 음식 먹어본 거나 여행을 가죠. 먹고 갔다 오면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뭔가 배우는 데 투자하는 것도 힘든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독학을 많이 했어요. 기타도 사진도 독학으로 배웠고요. 독학은 스킬적인 한계가 명확해요. 어느 이상 넘어가기 힘들더라고요. 대신 저는 물질적인 소유욕이 강한 편이라 카메라를 중고로 모으거나 옷이나 신발 사는 걸 좋아해요. 요즘은 경험에 투자하는 가치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하고 돌아왔을 때 그걸 경험하지 못한 나와 다른 관점이 생길 거니까요.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로 할 줄 아는 나와 못 하는 나는 다를 거예요. 여러 가지 경험이 쌓이면 뭘 할 때 안정을 느끼는지, 쉰다고 느끼는지 알 수 있는 폭도 넓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아깝다고도 느껴지지만 그만큼 돈값할 거니까 경험해 보려고 해요.
J 인터뷰 오늘 어떠셨나요??
P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너무 힘 준 느낌 많이 들 것 같아서 일부러 사전 질문을 안 받았어요. 저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되어서 더 길어진 것 같은데요. 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직면하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재미도 있고 인터뷰 경험 자체가 새로웠어요. 자존감이 낮아서 아무도 날 생각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제안하셨을 때 저를 특별하게 생각하셨다는 그 마음 자체가 감사했습니다.
J 저도 제 나름 기준에서 매력 있고 궁금하고 얘기가 잘 통하시는 분을 인터뷰하려고 해요.
P 통했다는 말이 참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