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와 E의 하모니
코이카 현지 파견되기 전 단원들끼리 경복궁에 갔다.
그곳에서 내가 제일 먼저 왔고 그다음 도착한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었다.
국내 훈련소에서는 얼굴만 알던 사이였다.
나에게 그의 첫인상은
‘왜 이렇게 말이 많지?’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각각 베트남과 이집트에 떨어져 연락을 주고받다 연인이 되고 결혼도 했다.
남자형제, 남중, 남고, 컴공과, 군대를 나온 남자.
요즘 말로 대문자 T.
결혼 초반에는 많이 힘들었었다.
이성적인 남편과 달리 감성적인 나는 상처도 많이 받고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이제는 나와 맞추어진 틀이 전부가 된 지금은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뾰족했던 2,30대를 거쳐 많이 둥글해졌다.
여행지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갈피 하나는 꼭 사다 주는 생존방법을 아는 남자가 되었다.
매번 집안에 물건 하나 못 찾아 매번 나를 찾는 남편을 보며
도대체 회사에서 어떻게 돈을 벌어오는 거지 싶다.
약속에 늦는 사람에게 불쾌해하는 남편을 보며, 그럴 수도 있지 이해되지 않았다.
전혀 정반대인 사람이 만나
서로를 알고, 닮고, 배워간다.
감성에만 치우쳐 있던 나는
남편 덕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면모를 배우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지도앱을 끼고 방향과 위치를 확인하는 건 내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덕분에 길치인 내가 함께 어딜 가면 안심할 수 있다.
컴퓨터 수리하는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컴퓨터 고쳐줄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이 곁에 있다.
무엇보다 아들 셋 키우면서 전우가 된 나의 짝꿍이다.
특히 남편은 세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조교처럼 도와줬다.
‘소리 지르지 마! 더 안 좋다잖아’ (너무 아픈 걸 어떡하냐고)
‘7까지 샐 테니까 호흡해 봐, 하나, 둘...... 여섯, 일곱’ (빨리 세, 7까지 못 버티겠다고)
아무리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만 어쩜 이렇게 원칙대로 하는지 야박하게 느껴졌다.
어디 출산 조교라는 직업이 있음 딱이겠다 싶었다.
그렇게 아이 셋의 부모가 된 우리 부부.
퇴근 후 남편의 인사는 매일 “오늘도 고생했어.”이다.
법륜스님께서 부부가 사이가 좋으려면 서로를 긍휼히 여겨야 한단다.
무슨 이렇게 어려운 단어가 있나 찾아보니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였다.
'아! 그래서 우리 부부가 잘 지내는구나.'
처음 아이를 키울 때 모든 것이 서툴렀다.
아이가 둘이 되었을 때 우리는 불필요한 싸움이나 감정 소모를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잠잘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셋이 되었을 때는 서로를 긍휼히 여기게 되었다.
나는 가장의 무게를 혼자 끌어안고 있는 남편이 고맙고 안쓰러웠다.
남편은 오늘도 전쟁을 치른 나에게 저녁마다 ‘고생 많았어’라고 말해준다.
남들은 부부사이가 좋아서 아이를 셋이나 있구나라고 말한다.
아니다, 아이가 셋이라서 사이좋게 지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