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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un 18. 2024

그림의 떡 러시아 여군

한국전쟁 고아 영화 Battle Hymn


해와 카스피해에 집중하다 보니 중학생 때 중랑천 건너편에 있던 휘경여중이 생각난다.

그때 신설 학교가 많이 생겼는데 입학하니 선배는 없고 우리 1학년밖에 없었다.

버스를 타고 등하교할 때 한 정거장 먼저 내리고 탔던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막 이성에 눈뜬 우리 까까머리 사춘기 남학생들과 서로 설렘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때 쉬는 시간에 축구를 많이 했고 핸드볼도 좀 했다.

그래서 키가 크고 운동 잘하는 친구들이 선수로 뽑혀 연습해서 시 대회에도 나갔는데 휘경여중도 핸드볼을 잘했던 기억이 난다.

휘경여중고 선수 출신 중 국가대표도 많이 나온 거로 알고 있다.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인가 이사장님이 한국전쟁 발발 전부터 고아원을 운영하고 그 눈물겨운 사연이 미국에서 영화로도 나왔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다.

Battle Hymn, 우리말로는 '전송가'라는 영화에서 당대 최고 배우 중 한 명인 록 허드슨이 헤스 대령 역을 맡아 안나 카스피라는 여배우와 열연하여 많은 이들을 울렸다고 한다.

실제 여주인공이 휘경여중 황온순 선생님이시다.

황 여사 역으로는 인도 출신 배우이며 말론 브란도의 부인이었던 카스피가 맡아 한복을 곱게 입고 한국 고아들을 돌보았다.


황 쌤은 이화학당 다닐 때 유관순 열사와 절친이었다고 한다.

전쟁 전부터 보육 활동을 했고 1.4 후퇴 때 미합중국 공군 대령 딘 헤스의 도움으로 천여 명의 고아를 제주로 이송하여 돌본 역사의 산증인이시다.

전쟁 후 이승만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국 보육원을 맡아 휘경동에 있다가 나중에 양주로 옮겼다고 한다.

일사 후퇴 때 서울에 있던 고아 천여 명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려고 그 난리 통에 트럭으로 공항까지 나르고 일본에 있던 공군 수송기를 불러 대대적으로 후송 작전을 해 무사히 제주도로 보냈다.


실제 수송 작전을 주도했던 사람은 미군 종군 목사 러셀 중령이었고 후에 이 일로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군법회의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이 죽음에 몰린 아이들을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차라리 군복을 벗겠습니다."

두 사람의 활약을 합쳐 한 사람 역으로 만든 것은 헤스 대령의 자서전으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책과 영화 수익금은 전부 한국 전쟁고아를 위해 기부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폭슬, 렛 고 앵커!"

"브리지 여기 폭슬, 라져, 렛 고 앵커!"

선교 삼항사와 선수 일항사의 마이크 소리가 선내를 울리며 스피커에서 앵커 체인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HAPPY LATIN' 호는 흑해 안의 노보로시스크 외항에 도착하여 포트컨트롤이 지정해 준 이스턴 앵커리지에 닻을 내렸다.


대기 중인 많은 화물선 사이로 항구 입구에 있는 큰 산을 깎아 시멘트를 만드는지 산이 파여있고 사일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였다.

무사히 도선을 마친 파일럿이 내리고, 통선을 타고 수속관이 개떼처럼 몰려왔다.

경비 군인, 검역, 포트컨트롤, 출입국 관리, 세관 그리고 대리점 직원 등이 방긋 웃으며 선박 사다리인 갱웨이를 타고 올라온다.

제복 입은 여성 동무도 서너 명이 씩씩대고 올라왔다.

당시 상선에서 입출항 수속은 통신장이 겸직하는 사무장 업무라 미소 지으며 선수들을 맞이했다.

미리 준비한 위스키와 담배, 라면 등이 든 접대 봉투를 모두에게 하나씩 내밀고 입항 수속은 금방 끝났다.

수금 나온 선수들께 인색하면, 존심 상해 트집 잡히고 마냥 시간 끄는 거지.

대리점 직원은 여기서 한 일주일은 대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갔다.


자, 일주일 동안 뭐하지...

일단 흑해 손맛이나 볼까.

릴낚시를 챙겨 선미에서 낚시 추를 던졌다.

항구에 간간이 떠다니는 쓰레기 사이에 움직이는 고기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 썰렁하다.

이 넓은 바다에 고기들이 다 어디 갔지?


입질하지 않아 두 번째 와본 러시아 땅을 바라보며 멍때린다.

잿빛 하늘 아래 해안 초소에서 러시아 군인이 방한모를 쓰고 긴 총을 등에 멘 채 꼿꼿하게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 여기가 혼또니 공산주의 국가의 심장이지...


어느 꿈같은 시월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곡물을 싣고 울릉도와 독도를 지나쳐 블라디보스톡 부근의 노보로시스크항에 들어간 적이 있다.

러시아 땅이 넓어 지명이 같은 곳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소련 해체 후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는지 지도에 안 보인다.

한국은 아직 가을이 무르익을 때였는데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앞이 안 보였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본 그런 눈보라가 사정없이 배 앞길을 뒤덮었다.

앞이 안 보이니 뱃고동을 계속 울리며 레이더만 보고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항구에 도착했을 땐 부두가,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꽁꽁 얼어있었다.

그리고 모든 풍경은 순백에, 건물은 얼어붙은 눈 사이로 삐져나온 붉은 벽돌 빼고는 우중충한 회색이었다.

그 당시 공산국가를 다녀오면 감상문을 써서 안기부에 제출해야 할 때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 북한 두만강이 있어서 아무도 상륙을 나가지 않았다.

나는 나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으나 안기부에 아는 사람도 없고 나 혼자 나갔다가 뒷감당을 어찌하랴.

갱웨이 끝까지 내려가서 땅은 밟지 않고 철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땅 냄새를 맡으며 불곰국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한 기억이 난다.

그때도 어김없이 잘생긴 러시아 군인이 총을 멘 채 바로 앞에서 표정 없이 서 있었다.

가끔 대리석으로 빚은 듯한 여군도 보였다.

그림의 떡을 영어로 뭐라더라.

'Rice cake of the picture'가 콩글리시인지, 'Pie in the sky'가 정확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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