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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an 24. 2024

억제할 수 없는 슬픔


그렇게 남희는 함부르크 항에서 떠나갔다. 한 순진한 바다 사나이의 가슴을 울리고, 상큼한 바다 내음 같은 웃음을 흘리며, 예쁜 반지를 낀 하얀 손을 흔들고 ‘HAPPY NINA’ 호를 떠났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말.

“내 가슴 한쪽은 늘 네게 가 있을 거야.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까지, 서로를 가슴에 고 사는 거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어.”

남희를 만나러 그 먼 뱃길을 헤쳐올 때는 무지개처럼 설렜던 허공에 뜬 느낌이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구름 위에 뜬 것같이 걸음걸이조차 두둥실 떠다녔지.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녀의 숨결을 느낄 때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힐 때, 그녀의 뛰는 가슴의 고동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 이젠 다가갈 수도, 향기조차 느낄 수 없다니.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아. 그냥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싶다고.


터덕터덕 남희가 떠난 선주 감독 방으로 간다. 그녀가 화장했을 거울 앞에 서 보고, 누워 있던 침대를 손으로 쓸어본다.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그녀가 신던 구멍 난 스타킹이 삐쭉 나와 있다. 누가 볼 새라 얼른 집어 가슴에 안아 본다. 그동안 참았다가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흐느낌. 행여 누가 들을까 이를 앙다물며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어 가슴을 쳤다가 바닥을 치고 고개를 흔들며 온몸으로 오열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안의 힘이, 기가 다 빠져나간 듯 남희가 버리고 간 스타킹처럼 축 처져있었다. 일심이체의 위장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다. 누군가 말하길 슬플 땐 더 배고프다더니, 그까이 거 한 끼 안 먹는다고 죽나?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 것. 항상 이별은 떠나는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아픈가 보다. 어딘가에 반드시 흔적이 남겨져서.... 우리는 순진해서 얼떨결에 사랑한 그런 설익은 사랑이 아니라 겪을 만큼 겪고 뒷걸음칠 만큼 치고도 어쩔 수 없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었던 건 아닐까? 처음이어서 그녀 심장의 고동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녀를 향한 열정과 나를 향한 남희의 순정이 세월과 거리를 넘어 닿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주 헤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왜 이리 슬퍼할까? 이별에 익숙하지 않고 어리숙해서 아쉬움이 더 컸을까? 그녀는 기약이 있는 헤어짐은 하나도 슬프지 않다던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건 아니건, 믿음이란 것은 사람을 기다릴 수 있게 하고, 살게 하니까. 그래서 그녀는 머리 쥐어뜯고 후회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감사한지 하고 싶은 말 절대로 숨기지 않고 다 한다는데....


캡틴의 선내 방송이 들린다.

“국장! 어디 있소? 빨리 식사하고 본사와 차타라에 전보 보내야지. 얼른 식당으로 내려오소.”

아, 정신 차려야지. 내가 이러할진대 남겨두고 떠나는 남희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질까. 또다시 북받쳐 오르는 슬픔. 침실로 돌아가 그녀의 스타킹을 베개 밑에 고이 간직하고 세수를 한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쳐다보고 짙은 색의 안경으로 바꿔 끼고 사관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이, 어서 와요, 국장. 다들 식사 끝났네. 얼른 식사하소.”

마주친 눈을 얼른 외면하면서 반갑게 맞이하는 캡틴.

“네....”

일항사가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어, 국장! 형사 같소.”

“아, 네....”

“국장 기분도 그럴 거 같고, 어이 싸롱! 내 방에 가서 냉장고에 있는 와인 갖다가 좀 데워 오니라.”

캡틴이 말하자 일항사도 거든다.

“싸롱! 올라간 김에 내 방에서 잉카 콜라 한 병 갖고 와요. 국장 주게!”

그러면서 작은 소리로 ‘우씨, 아껴 먹는 건데, 이제 몇 병 안 남았잖아.’라고 중얼거렸다.


노란 잉카 콜라는 루의 국민 음료다. 가게에서 콜라 달라고 하면 그냥 황금색 잉카 콜라를 준다. 뻬루에서 코카콜라나 펩시의 점유율은 미미하고, 코카가 전 세계에서 이기지 못한 유일한 콜라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시판된 적이 있었단다. 코카보다 덜 쏘는 맛에 조금 더 단맛이 난다.


나는 남희가 앉았던 자리를 넋 나간 듯이 쳐다보다가 또다시 터져 나오는 슬픔을 삼키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식당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일항사가 ‘어~ 어! 국장.’하고 뒷말을 못 잇자 안 선장님이 혀를 차면서 한마디 한다.

“어이, 쵸사! 거 이왕 주려면 기분 좋게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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