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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09. 2024

선박 화재와 적도제



“올 스탠바이, 올 스테이션!”

숯을 가득 실은 거대한 ‘HAPPY LATIN’ 호는 기관실 엔진이 힘차게 돌아가고 숯 검댕으로 까만, 포인트 우부 항을 뒤로하고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포르투갈을 향해 북으로 선수를 돌린다.  

선미에 있는 연돌에서는 벙커 에이가 덜 연소한 검은 연기와 쌓여있던 숯가루가 함께 하늘을 뒤덮는다.

도대체 배 안팎에 숯가루가 없는 곳이 없다.  

도선사가 내리자마자 갑판부 선원들이 달려들어 120mm 소방호스로 선내 물청소를 시작했다.

스크루 뒤로 까맣게 따라오는 본선에서 흘러내린 숯가루 물거품.  

바다가 파래야 제 색인데 우리 배 때문에 까맣게 변하니 죄짓는 기분이다.


배 밑바닥 밸러스트 탱크에 해수를 가득 채웠는데도 숯이 무게가 가벼워 만선이지만 배는 수면 위로 붕 떠 있다.

이 밸러스트 워터가 생태계 변화와 오염에 일조한다.

전 세계 물동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화물선은 선적 화물이 충분하지 않으면, 선박의 안정성을 위해 밸러스트 탱크에 해수를 넣어 운항한다.  

이 밸러스트 물은 선박이 철재로 건조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 사용되었다.

그전에는 자갈이나 모래, 전 같은 것을 바닥짐으로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밸러스트 워터는 토착 생태계를 파괴하고 교란하기에 문제가 큰데 연간 수백억 톤이 이동되고 있다.


호주 바다는 청정지역이라 고유의 전복, 조개 등 어패류가 널려 있는데 북태평양 아무르불가사리가 나타나 초토화되었고, 우리나라 연안에는 지중해산 담치가 들어와 홍합과 미역, 멍게에게 타격을 주고 발전소의 취수구를 막는 등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밸러스트 탱크 내의 해양생물은 약품이나 기계로 걸러 일부 제거할 수 있으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치어나 알까지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은 아직 없다고 한다.


좌현에 아스라이 브라질을 스치며 포르투갈의 오 뽀르또 항을 향해 부지런히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적도가 가까워진다.

적도의 열기에 낮에는 배 갑판도 녹일 듯 철판이 쩔쩔 끓는다.  

점심때 먹은 시원한 냉면도 어느덧 소화가 다 된 것 같아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어제도 뛰었듯이 오늘도 갑판 위를 달린다.  

자동차와 중장비를 싣고 남미로 내려올 때는 갑판 위가 복잡해 다칠까 봐 제대로 뛰지를 못했다.

순풍에 돛 단 듯 남대서양의 거울같이 잔잔한 바다를 물 찬 제비같이 항해하는 ‘HAPPY LATIN’ 호.   

작열하는 태양과 더운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 로키처럼 갑판 위를 달렸다.

하우스마린을 향해 뛸 때는 당직 서고 있는 일항사와 조타수가 엄지손가락을 한 번씩 추켜올려준다.


그런데 한창 달릴 때 배 중간의 3번 홀드를 지나면서 느낌이 이상하다.

적도의 뜨거운 열기와는 분명히 다르다.  

다시 선수를 돌아 뛰며 3번 홀드 쪽으로 가까이 가니 너무 뜨겁고 숯 타는 냄새와 연기가 솔솔 새어 나오는 게 보인다.

불붙은 거 아니야?  

선교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일항사에게 연기난다고 고함을 쳤다.


화재 경보가 울리고 최소 당직자를 제외한 전 선원들이 갑판으로 뛰어나온다.  

해치 커버는 이미 손댈 수 없이 뜨거워져 있다.

일단 소방호스로 해수를 쏘아댄다.  

크레인으로 해치 커버를 열자, 가스 프리해주는 작은 파이프 말고는 밀폐되어 있던 홀드 안에 공기가 들어가 벌건 불이 확 올라오며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브리지에서 캡틴의 고함이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울린다.

“어이~ 당황하지 말고 불 한두 번 보냐? 좀 떨어져서 소방호스로 계속 쏴! 이항사는 선원 두어 명 데리고 선내에 있는 소방호스 있는 대로 다 가지고 와! 쵸사는 인명 피해가 없도록 캐라!”  

일단 불길을 잡자, 캡틴이 다시 명령한다.

“쵸사! 다른 홀드도 다 열어서 이상 없나 확인하소.”  

다른 홀드는 별 이상이 없다.

전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잔가지와 낙엽 쓰레기를 태운 적이 있는데 다 태우고 물을 뿌려 잔불을 끄다가 비가 와 안심하고 잊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 이튿날 그 자리에서 연기가 나고 빨간 불씨가 아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잔불이 무섭다는 건 알고 있으나 그렇게 잘 마른 줄 알았던 숯덩이의 작은 불씨 하나가 몇 날 며칠을 숨죽이고 있다가 적도의 열기에 서서히 발화하여 거대한 ‘HAPPY LATIN’ 호를 삼켜버릴 했다니.

본사와 대리점에 본선에 불씨가 남은 숯이 실려 큰불이 날 뻔했다고 강력한 어조로 전보를 때렸다.




선교 한가운데에는 돼지머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욕재계하고 제사상 가운데 눈을 감고 선원들을 향해 방긋 웃고 있다.

안 선장님이 이항사에 웃으며 말한다.  

“어이, 세컨사. 적도제 해 봤나?”

“아뇨. 말만 들었습니다.”  

인상 좋은 해군 중위 출신 이항사가 아직 군기가 덜 빠진 듯 씩씩하게 대답한다.

“그래, 써드사는?”  

“네, 저도 실습선 탈 때 적도는 통과 못 해봤습니다.”

두 젊은 사관이 서로 쳐다보며 웃는다.  

캡틴도 두 항해사를 보며 미소 짓고 일항사에게 말했다.

“천상 일항사가 적도제를 지내야겠구먼, 불 난 뒤풀이도 하고.”  

기관장이 지켜보다가 한마디 거든다.

“예, 캡틴!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런 제사를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먹고 노는 거지. 안 그렇소, 국장?”  

모두 웃으며 캡틴을 쳐다본다.

“그려, 그렇게 합시다. 어이, 실항사! 자네 노래 잘한다며?”  

실습항해사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항사가 얼른 나선다.

“아, 얼른 기타 가져와! 돼지한테 절 안 하려면.”  

해도 상 적도에 가까워지자, 여기저기에서 긴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우리 선원들만의 낭만인가?


배가 적도를 통과할 때 안전한 항해나 만선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적도제는 범선시대에 배가 바람이 불지 않는 적도 부근을 항해할 때 바람이 불기를 기원하며 해신에게 지냈던 의식에서 시작했다.

적도 부근은 온도가 높아 기류가 상승해 스콜이 매일 내리는데 바람은 약하다.

그래서 범선이 통과하기가 어려웠다.

적도제는 이렇게 생겨난 배에서 중요한 의식이다.

이 풍습은 지금도 남아있어 적도를 통과할 때 적도 통과 경험이 제일 많은 사람이 해신으로 분장하여 경험이 없는 선원들을 골려주기도 한다.

돼지머리와 과일, 떡, 북어 등으로 상을 차리고 큰절한다.

제가 끝나면 정종이나 소주, 맥주를 마시며 전 선원과 승객들이 즐거운 파티를 한다.


아이가 부모를, 또는 친한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는 현상을 싱크로니 효과라고 한다.

부부가 닮아가고 자매와 친구끼리 어투와 생각이 비슷해지듯이.  

우리 ‘HAPPY LATIN’ 호 승조원들이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중독되어 공유하는 말과 동료애가 만만치 않다.

천천히 지는 적도의 석양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 동료 선원들에게 적지 않은 마음의 선물을 받아왔다는 것을 느낀다.

나 혼자 잘난 척 생각하지만, 나보다 능력이나 심성이 뛰어난 사람은 천지에 널려있고, 나 없어도 세상은 안 무너지고 잘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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