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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kim Mar 05. 2020

다섯 번째 산맥

6. 활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온, 아케이드의 모습


활시위를 당기다



샌드위치 메이커로 6개월가량 일했을 때다. 캐셔였던 스테파니는 요리학교 입학이 확실해지자 가게를 그만두었다. 몇 번의 면접을 끝으로 사장님의 근심은 깊은 수렁에 빠졌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스테파니가 사장님의 눈높이를 성층권까지 올려놓았으니 말이다.


옆에서 살금살금 눈치만 살피던 나는 굶주린 사장님의 머리맡으로 냅다 미끼를 던졌다.

샌드위치 메이커 구하는 건 훨씬 쉬울 텐데요.

사장님은 나에게 '뭐라고?' 라며 되물었고, 마른행주로 도마를 닦던 나는 회심의 한방을 날렸다.

저 요즘 영어학교 다니거든요.

그렇게 나는 '한 달 후부터 지급'을 조건으로 시급을 1불 더 올린 후 캐셔 잡을 따냈다.


사실 사장님 입장에서 보자면 나라는 일꾼은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아니 오히려 정말 괜찮다고 할 수 있겠다. 왜 그 자리에 나를 고려하지 않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면 여전히 공백이고, 그에 있어 여전히 살짝은 삐져있는 상태다.


자기 PR의 시간을 갖자면, 영어는 조금 짧았으나, 빡센 주방 경험의 소유자로 아침,점심,마감시간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얍삽이의 아이콘이 샌드위치 메이커 3개월을 하며 홀 업무의 전반적인 내용마저 파악하고 있던 그야말로 만능이었단 말이다. 그런 나에게 잡 오퍼를 하지 않은 사장님이 밉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을 테지,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해본다.



흔한 카페의 풍경



활을 쏘다


나는 더듬더듬의 영어실력으로 캐셔 자리를 거머쥐었다. 손님이 조금이라도 어려운 단어를 쓰거나 나의 의견을 피력해야 할 상황이 오면 혀와 이빨을 꽁꽁 걸어 잠그고서는 그저 '음흠~예아~' 하었다. 어느 날 메인 바리스타 오빠가 손님과 이야기를 하다 말고 사장님께 소리쳤다. 사장님! 우리 가게 캐셔 친절하다고 소문났다는데요?


아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구나. 나는 그 순간 또 한가지를 배웠더랬다.


그렇게 제대로 된 문장 한마디를 못했으면서도 스물다섯의 나는 주눅 들지 않았다. 당당함의 근원을 생각해보자면, 난 뭐든 다 해낼 거라는 믿음이었지 싶다. 맹목적인 자기 사랑의 효과는 실로 위대했다. 나는 점차 손님들과 말을 트기 시작했고 다소 머쓱한 순간이 와도 바보처럼 울지 않을 수 있었으며 다음에 꼭 써먹어야지 하고선 몇 번이고 되내었다. 호주 살면서 언제 영어가 제일 많이 늘었어?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 순간, 나는 기막힌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 기억은 노랗고 밝고 찬란하다. 그리고서는 '나 카페 일하면서 영어 배웠어'라고 대답한다.




그 짓을 반년 조금 넘게 했을 때였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손에 익은 일로 인해 나는 정말 능수능란해졌다. 스리슬쩍 주방 상황을 넘겨다 보는 것만으로도 셰프가 이 손님의 요구사항을 채워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고 저쪽이 바쁘면 샌드위치를 빼기도 했고 이쪽이 바쁘면 홀서빙을 하기도 했으며, 그리고는 커피 역시! 어떤 날에는 커피도 뽑아냈다!


커피 언니가 아파서 못 나온 날이 있었다. 헤드 셰프이던 사장님이 홀에 나와 캐셔를 보게 됐고 그로 인해 나는 언니 자리로 밀려났다. 사장님이 커피를 뽑을 줄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걱정 반 기대 반의 나는 하루 9kg의 커피콩을 팔아 대  가게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야 말았다.(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나는 너무나 멋졌다)


커피 언니는 주 7일을 일하는 사람이었다. 돈을 모아 조만간에 한국으로 뜰 거라고 이야기했다. 쉼 없이 달리던 언니는 막판 레이스에서 자주 아팠다. 네 개의 손이 절실한 커피머신 앞에서, 너무나도 자주, 두 개의 손만이 남아 아등바등하게 만들었다. 결국 언니와 오빠의 관계는 하한가를 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아주 오래도록 기다려온 그 절호의 찬스라고.

정말이지 극악무도한 인성의 소유자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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