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캐셔란 홀의 전반적 상황을 낱낱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아까 저 손님이 무엇을 시켰는지, 시킨 지 얼마나 지났는지 또 100m 밖에서 내 눈을 보며 하이 지윤이라고 말하는 저 남자의 이름은 무엇이며, 단골 메뉴가 무엇이었던가 역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밝은 인사를 하면서도 나의 손가락은 레지스터 머신 앞을 바쁘게 타닥거리고, 알면서도 또 한 번 '라지 스킴 캡 원슈가?'(Large Skim milk Cappuccino with 1 Sugar) 하고서 물어본다. 고로 경험자의 입장에서 카페 캐셔라는 직업이란 육체노동이라기보단 정신노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유아교육학 과정은 캐셔가 되고서부터 시작을 했는데, 나는 화, 목, 금 저녁 수업반을 선택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은 3시였고 수업 시작 시간은 5시 반이었기에 나에게는 2시간 반이라는 텀이 있었다. 나는 이 귀중한 시간을 절대 헛되이 쓰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수업 과제를 하는데에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대신 내가 주 3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시드니에는 눈이 오지 않지만) 했던 짓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바로 하버브릿지 걸어서 건너가기.
사진 위쪽의 중심으로 뾰족 솟은 타워가 보인다. 그곳이 시드니 시내이다. 그 아래로 요트가 떠 있는 만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아래서 설명할 라벤더 베이.
노스시드니에서 학교가 있는 시내까지는 기차로 다섯 정거장으로 걸어서 한 시간 반의 거리다. 노스 시드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북단과 남단을 잇는 하버 브릿지를 통해야지만 시내로 넘어갈 수 있다.(다른 길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가장 빠른 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25살의 미친 열정을 누가 막을 수 있을쏘냐. 설거지만 주야장천 했던 나에겐 기대조차 못할 일이다. 가만히 서서 정신노동만 했기에 가능했던 짓이기도 하다.
처음 걸어가 보자 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사실 호주의 교통비였다. 편도로 2불 30센트. 올 때, 학교 갈 때, 집에 갈 때. 총 세 번을 찍으면 거진 7불(한화 6천5백 원가량) 이란 돈을 숨만 쉬면서도 내다 버리게 되는 건데, 시급 16불의 소녀는 그 돈이 그렇게도 아까웠더랬다. 고로 세 번중 한 번은 내 두 발을 이용해 절감할 수 있으니 일단은 걸어보기로 한다.
라벤더 베이는 어쩜 이름도 라벤더 베이인지.
내 일터에서 하버브리지 까지 가려면 조금은 외진 뒷 길을 따라 쭉 내려가야 했는데, 이 길도 참 재미있다. 가는 길목에는 기묘한 가게들이 꽤나 많았다. 그중 인상 깊던 장소는 앤틱 소품이 가득했던 어두침침한 북카페였다. 구석에 박혀있어 아무도 모를 것 같다만 평일 오후 시간대에도 늘상 바글바글했다. 녹색 캐노피 아래의 통유리가 상당히 근사해 보였는데, 그 안을 곁눈질로 훔쳐보던 중 내 마음에 콕 들어온 케이크 모양이 생각난다. 거진 테이블마다 하나씩 놓여 있던 걸로 봐서는 그 가게의 시그니처였지싶다. 금색 받침대 위의 빨간 조각 케이크는 장미 모양이었고 그 속은 녹진한 크림(아마도)으로 그득했다. 무슨 크림일까. 치즈? 생크림? 슈크림? 얼마나 맛있었을까? 용기 내 그 가게에 들어가 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된다.
카페를 지나치기 전 큰길 코너엔 비싸고 오래되어 보이는 외제차들을 모아 파는 가게가 있다. 아주 강렬한 색상의 페라리, 람보르기니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으나 차에 별 관심이 없으니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자전거가 천장에 주렁주렁 걸려있던 태국 음식점도 있었고, 벽면이 온통 번쩍거리는 악세사리 가게도 있었는데 이중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가장 아끼는 장소라고 말하고 싶은, 숨겨진 아지트를 조심스레 소개해 보려고 한다.
바로 라벤더 베이, 웬디의 비밀정원
라벤더 베이는 작은 선착장이 있는 만이라고 볼 수 있다. 하버브릿지를 올라타기 직전에 있는 곳인데 수풀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녹색의 공간으로 몸을 우겨넣으면 아주 커다란 고목나무와 그 아래 벤치, 때때로 근처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들을 지나쳐 내려오면 누군가가 공들여 가꿔놓은 정원이 나온다. 동글동글하니 키 낮은 나무들과 녹슨 분홍색 의자, 오래된 편지통이 자리하는 곳. 이곳이 웬디의 비밀정원이다.
정원을 따라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다 보면 짧은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 저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낡디 낡은 선착장 뒤로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란 바다, 그에 맞닿아 있는 투명한 하늘. 그 푸른 바다 위를 넘실넘실 떠다니는 하얀 요트가 인상깊다. 그리고 시선의 끝자락에 하버브릿지가 걸린다. 처음 그곳에 간 날엔 해가 뉘엿이 넘어가는 중이었고 나는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나 지금 동화 속에 와있어.'라고 말했더랬다. 정말이지 동화 같은 곳. 언제고 바스러질 환상과 같은 곳.
그 어느날 친구가 말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은 없다고. 시간이란 단 한순간도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고.
고로 나에게 있어서 한 시간 반들이 모여 만든 그 위태로운 모래성은 무엇보다 소중한. 결단코의미 있던 순간들이라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