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흑인 남성에 대한 트라우마
나는 제나의 집에서 몇 달 얹혀살았다. 감사하게도 제나의 동생들이 (나와도 친했다) 나에게 먼저 집세도 절약할 겸, 들어와서 함께 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 주었다.
집은 전원주택이었고 남는 방도 있었기에 나는 이게 웬 횡재냐 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집에 딸려있는 마당도 앞뒤로 넓직했다. 뒷마당에는 별채가 하나 있었는데 방하나와 작은 부엌, 화장실이 딸려있었다. 난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비 오는 날의 별채는 다소 습한 편이었지만 살기 힘들 정도는 아니다. 습한 것 치고 곰팡이가 슬지도 않았고 벌레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방의 천장이 높은 편이었기에 제나의 동생들이 이 공간을 활용해야 한다며 조그마한 방을 무려 세미 복층으로 탈바꿈시켜주었다. (그들은 건축업자다.) 1층에는 옷장과 책상, 작은 티비를 놓았고 2층에는 매트리스를 올렸다. 아주 흡족했다.
그곳에서의 삶은 (남들이) 걱정했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당시 나는 평일 아침 일찍 일어나 카페 알바를 갔다가 오후 여섯 시나 돼야 집에 도착했으며, 저녁도 왕왕 밖에서 해결했기에 아이들과 마주칠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주말에 그들은 골프니, 파티니 이래저래 나보다 더 바빠서 시간이 안 맞는 날에는 한주 내내 얼굴을 못 보는 때도 있었더랬다. 이 평화로운 나날들이 삼 개월을 조금 못 넘겼을 때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여느 날과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 있었다.(당시 진의 가게가 있는 시내로 일을 다니던 차였다.) 버스 정류장이 조금 외진 곳에 있었지만 치안이 좋은 동네이고 또 이른 시간이라 단 한번도 무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버스를 타려면 집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8분. 나는 언제나 아침 5시 58분에 집에서 나왔고 내가 타야 할 버스 시간은 15분 후인 6시 13분. 그리고 사건은 6시 11분 즈음 벌어진다.
때는 여름. 날은 환했으나 이른 아침이기에 거리엔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았다. 버스가 오려면 한 오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벤치에 앉은 나는 핸드폰과 지갑을 가방 안에 우겨넣고 쿠션 팩트를 꺼내 찰박찰박 바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평소 루틴.
멀리서 하얀 혼다 차량이 빠르게 달려와 내 앞에 선다. 그리고는 뒷문이 열린다. 내리는 사람은 아프리카계 흑인 남성. 180이 훌쩍 넘는 그가 나에게 다가오며 역전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은 채 한발 다가서며 입을 떼는 순간, 흑인은 내 옆에 놓인 가방을 낚아 채 자동차 안으로 들어간다.
가방 끄트머리를 힘주어 잡았으나 거구의 남성을 160도 안 되는 내가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대차게 내치는 손길로 인해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며 무릎과 팔뚝 팔목에서 피가 철철 나기 시작한다. 핸드폰도, 지갑도, 그리고 어제 받은 웨이지도 전부 가방 안에 있기에 다른 방도가 없는 나는 집으로 되돌아간다. 곧바로 신고를 한 후 경찰서로 간다. 거진 두 시간에 걸쳐 진술 조서를 쓰고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5킬로 정도 떨어진 동네부터 시작해 내가 당한 지역까지. 전 날부터 해서 7건의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던 아마추어 날치기단(?)이라고 했다. 하얀 혼다 차 역시 도난 차량으로 그들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처참히 버려진 내 가방과 지갑은 찾았으나 핸드폰(산지 일주일 된), 현금 등은 당연히 돌려받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후줄근한 행색을 했건, 전문적인 차림을 했건 간에 모든 남성, 특히나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내 3미터 근방으로 접근하는 것이 몹시 꺼려진다.
내 뒤에 있는 남자의 모든 것이 수상쩍고, 머릿속이 새햐얘지고,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다.
이렇게 호주에서 또 하나의 정신적 충격을 얻고 마는, 힘들고 힘들었던 하루를 끄적여본다.
(이것은 인종 또는 성차별에 관한 내용이 아님을 알아주세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