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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퍼 Sep 18. 2020

Ep.43 펍에서 만난 할아버지

시티에는 정말 많은 바(Bar)가 있는 것 같다. 평소에 자주 지나다니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지인이 알려주기 전까지 바가 있는지도 몰랐다. 퇴근 후 회포를 풀기 위해 로빈, 카일과 함께 바에서 칵테일 한잔 하기로 했다.

바는 주로 혼자 가는 편이지만 새로운 곳은 혼자 가면 뻘쭘해서 처음은 지인들과 시작을 하는 편이다. 


조명은 어둡지만 사람들의 입모양은 볼 수 있을 정도의 밝기, 갓 파더의 시나몬 향기, 잔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적당한 소음이 바 내부의 분위기를 한층 살려주는 것 같았다.  카운터 쪽에 자리를 잡고 바텐더들이 칵테일 만드는 모습을 구경했다. 현란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들의 주조하는 솜씨에 매료되어 구경하다 어떤 술을 마실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오더를 기다리는 바텐더를 보며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두 잔 이상 마시면 다음날 숙취로 고생을 해 칵테일을 고를 때만큼은 신중했다. 오랜 고민 끝에 평소에 마시던 불 바디에를 포기하고 루이지안을 마시기로 했다. 루이지안이라는 칵테일은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도전을 의미하는 술이었다.  이 칵테일을 고른 이유는 한동안 세컨드 비자를 취득하러 농장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드디어 농장을 가지 않기로 힘든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에 나의 결정에 보답하듯 새 출발을 위해 루이지안을 선택했다. 


칵테일을 다 마실 때 즈음 옆에 있는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바 석에 앉으면 이런 우연한 만남 또한 즐거웠기에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몇 년째 이곳에 오는 단골손님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이미 바텐더들도 이 분과 안면이 있고 몇몇 바텐더보다 이 바를 더 오래 다녔다고 한다.  

막 호주에 도착할 당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버거웠는데 이제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게 참 대견하고 느낀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어떻게 호주에 오게 되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등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세컨드 비자를 취득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중 농장에 가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고 하자 아저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건드리면 안 될 이야기를 건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근 아저씨는 자신의 파트너와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호주 정부에서 이민 법을 개정하면서 호주에 거주할 수 있는 비자 조건이 되지 않아 말레이시아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당장 호주에 거주할 수 있는 비자가 없기에  파트너가 호주에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좋은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섬주섬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데 아저씨가 자신의 파트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가방 속에 있던 것은 A4용지에 프린트한 파트너의 사진이었다.  핸드폰으로 파트너의 사진을 보는 게 어려워 일일이 프린트해서 외출할 때 꼭 들고 다닌다고 이야기한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 속에 녹아 잇는 추억을 공유하는데 눈시울이 붉어질 때마다 나도 감정에 복받쳐 몇 번 붉어졌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파트너가 멜버른으로 올 것이라고 하자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응원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호주 정부에서 이민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매년 이민 법을 개정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개정할 때마다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 에게는 몇 년간 준비한 이민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마 아저씨의 파트너는 이민을 준비하다 개정된 이민법으로 인해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한 것 같다.  모든 일에 쉬운 건 없지만 아저씨의 파트너가 호주에 잘 머물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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