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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종은 Aug 17. 2020

나도 소중한 사람이었음을

나의 어린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육아

출산 후 원래 계획은 이랬다. 2주간의 산후조리원, 그리고 이후엔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산후도우미. 엄마는 산후조리원도 가지 말고 집으로 오면 엄마가 산후조리 다 해준다고 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정 내 산후조리를 해주고 싶으면 산후도우미 자격증을 따오라고 했다. 미국서 출산한 친구의 엄마는 딸 조리해준다고 한국서 산후도우미 자격증을 따고 갔다는 말을 들먹였다. 엄마랑 있으면 분명 싸울 거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너무 좋고 사랑하지만 24시간 붙어있으면 싸우는 게 엄마와 딸 관계 아니겠는가. 그동안 엄마와 단둘이 떠난 수많은 여행에서도 한 번도 안 싸운 적 없는 우리었다. 출산 후 몸이 피곤한 상태에 아이까지 있어 예민해져 있다면 더더욱 엄마와 싸울 게 뻔했다. 산후도우미가 집에 찾아와 아이를 돌봐주는 시스템이 있고, 비용까지 정부에서 지원해준다고 하니 엄마에게 큰소리치며 도움을 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당하던 나의 태도는 출산이 다가오며 바뀌었다. 코로나19의 유행은 예상밖이었기 때문이다. 신생아를 어디서 누굴 만나고 왔을지 모를 사람에게 맡기자니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사실 조리원도 찝찝하긴 매한가지였지만, 주위에서 조리원은 꼭 필요하다고 해서 일단 가기로 했다. 하지만 산후도우미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신생아는 잠만 자니까 크게 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하지만 역시 나의 착각이었다. 물론 아이는 먹고 자고 싸기만 한다. 그리고 그 무엇하나 혼자 할 수 없기에 먹여주고 트름시켜주고 재워주고 기저귀도 갈아줘야 한다. 가끔은 그 모든 것을 동시에 하기도 한다. 나를 닮은 것인지 유난히 목청이 큰 우리 아이.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울며 이 모든 의사 표현을 하는데,  도통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넘어갈까봐 패닉상태가 되곤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먹고 자고 싸는 사이클이 빨리 돌아오다보니 쉴틈없이 바빴다.


결국 믿을 건 엄마뿐이다.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SOS를 쳤다. 엄마는 엄마가 내민 손을 단칼에 거절했던 게 서운했었을 법도 한데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기꺼이 도와주시겠다고 나섰다. 가장 이상적인 건 내가 엄마 집에 들어가서 같이 아이를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위 친구들을 보면 100일 때쯤까지는 엄마 집에서 같이 살면서 아이를 키우고 산후조리를 하곤 했다. 엄마도 내심 집으로 오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집에 육아 관련 세팅을 다 해둔 상태. 엄마에게 집으로 와달라고 했고 그렇게 엄마는 늦은 나이에 출퇴근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초반엔 엄마가 집에 오면 난 잠자기 바빴다. 엄마는 아기를 돌볼 테니 들어가서 좀 쉬라고 하셨고 나는 이때다 싶어 냉큼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슬금슬금 일어나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엄마 옆에서 아기 사진이나 열심히 찍곤 했다. 엄마가 오면 그야말로 육아 해방이었다.


그러다 여름 휴가 시즌이 도래했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휴가를 가신다고 3일간 못 오신다고 하셨다. 남편도 출근해서 밤늦게 오는 상황. 비상이다. 당시 나는 육아 스킬이라곤 전혀 없는 왕초보였다. 하루는 엄마가 가고 남편이 오기 전까지 품에서 잠든 아기를 어쩌지 못해 그대로 굳어있던 적도 있다. 퇴근한 남편이 아기 재우느라고 집안 불을 다 꺼둔 거냐고 물었고, 나는 움직이지 못해 못 켜고 있었던 거라고 대답했었다.


그때부터 내 나름의 특훈이 시작됐다. 엄마가 오셔서 아기를 돌볼 때면 들어가 자는 대신에 엄마의 육아를 열심히 관찰했다. 엄마만 오면 울지 않고 세상 순한 아기가 되는 그 비법을 알아내야 했다. 아기가 칭얼대려는 싸인을 보낼 때 재빨리 아기가 뭘 원하는 건지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내 귀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울음소리가 엄마에겐 번역이 되는 듯했다. 엄마는 아기가 울려고 하기 전에 “오~ 우리 아가가 더워요~?” “엄마야~ 아기 배고프다~ 젖 물려라~” “오구오구 기저귀 갈아달라고?” 등등 즉각 반응했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아기의 오감 발달을 위해 별의별 것을 다 했다. 마사지는 물론이고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기에게 시각적인 자극을 줬고, 음식 냄새부터 치약 냄새 까지 틈만 나면 후각 자극도 주려고 했다. 자극을 많이 받아야 아이 발달에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아이에게 말을 걸고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정말이지 쉴 틈 없는 육아 현장이었다. 다만 나와의 차이점은 타의에 의해 쉴 틈이 없는가, 자의에 의해 쉴 틈이 없는가 정도랄까.


그날은 유난히 아기가 내 얼굴을 닮은 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아기와 엄마를 보고 있으니 마치 스크루지 영감이 꿈속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본 것처럼 나도 과거로 돌아가 나를 돌보는 엄마를 보는 것 같았다. 엄마가 나를 저렇게 키웠겠구나. 날 귀하게 키웠다는 말은 엄마를 통해 들어왔었지만, 사실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내가 정말 애지중지 큰 사람이었구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도 소중한 사람이란 걸 잊고 지냈었다. 엄마가 날 소중히 대하는 마음도 당연하듯 가볍게 여겨왔다. 사회생활 하면서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스스로를 많이 깎아 나갔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나는 하나의 그림에서 그저 점묘화 속 수많은 점들 중 하나가 되어가는 느낌이기도 했다. 특히 임신과 출산을 하며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었다. 내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 같은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엄마의 육아를 보며 느꼈다. 아, 나는 참 귀하게 컸구나. 나도 사랑받는 소중한 사람이었구나. 엄마가 나를 이렇게 사랑으로 키웠는데 정작 나는 나를 사랑해주지 못했구나. 그동안 엄마에게 투덜대고 못나게 굴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졌다. 그리고 엄마가 아끼고 귀하게 키운 나를 나도 귀하게 여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창하진 않았다. 귀찮아서 대충 찬물로 세수하던 걸 온수가 나올때까지 기다렸다 세수한다거나, 과자 대신 견과류를 먹는다거나. 스스로를 아끼는 방법은 사소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 조차 아이에겐 정성을 다 했고, 나에겐 언제나 대충대충 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 스스로에게도 아이를 대하듯 정성을 다 하기로 했다. 어렸을 적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 처럼. 


아기가 자라서 세상살이에 지쳐 스스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잊었을 때, 내가 얼마나 정성껏 키운 아이였는지 알려주고 싶다. 본인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은 존재인지 알았으면 좋겠고, 그래서 스스로를 가치 있게 대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우리 아이의 자존감이 떨어졌을 때 되돌아볼 기록들을 많이 남겨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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