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또 한 명의 가족
아기를 낳으면 그렇게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던가. 나 역시 아기를 낳으면 엄마가 밖에서 기다리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 19 상황. 병원은 남편 외 다른 보호자 출입을 금지시켰다. 아기를 낳아도 입원 기간 동안 엄마를 볼 수 없다. 불안했지만 옆에 있는 남편이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길 바랄 뿐이었다.
출산 전 입원이 결정되자마자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가 걱정하실까 봐 최대한 담대한 척 ‘엄마, 나 이제 애 낳으러 왔어요~’ 라고 밝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 겁쟁이 성격이 어디서 왔겠는가. 원조 겁쟁이 엄마는 내 전화를 받고 긴장한 목소리로 지금 바로 출발한다고 했다. 이미 밤 11시가 넘은 시각. 오셔도 병원에 못 들어온다고 했더니 병원 문 앞에 서 있겠다는 엄마. 뭣 하러 그러냐고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호들갑이라는 투로 엄마를 말렸다. 물론 속으론 나 역시 난생처음 겪는 출산에 꽤나 긴장했지만, 나보다 더 긴장하고 걱정할 엄마 생각에 밝은 척 아무렇지 않은척했다. 조금 더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이내 간호사가 들어왔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아이를 낳고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엄마와 다시 통화할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전화를 했겠지만 그날따라 엄마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영상통화를 걸었더니 수척해진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가슴이 찡해지려는데 엄마는 내 얼굴을 보더니 살짝 당황하셨다.
“무슨 방금 애 낳은 산모 얼굴이 이렇게 좋아??”
엄마는 밤새 걱정돼서 잠 한숨 못 자고 불안한 마음에 괜히 거실을 왔다 갔다 하셨다고 한다. 아무리 의료기술이 좋아지고 큰 대학병원이 근처에 있다 하더라도 워낙 변수가 많은 게 출산 아닌가. 만에 하나의 경우가 내 딸에게 일어나면 어쩌지라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나셨다고 했다. 하지만 영상통화로 멀쩡한 내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는지 웃으셨다. 생각 보다 붓지도 않고 멀쩡한 얼굴로 웃으면서 애 낳았다고 자랑하는 딸. 무용담처럼 얼마나 아팠는지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구나 싶었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보며 엄마가 출산했을 때를 추억하셨다. 그 당시 엄마는 제왕절개 수술을 하셨었고, 엄마의 엄마였던 할머니는 병원에 있는 기도실로 가셨다. 출산 전 아이의 성별을 알려주지 않던 시절. 또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이 있던 시절. 그런 시절이었기에 엄마는 할머니의 기도가 ‘아들 낳게 해주세요’ 일 거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딸이 애를 낳는다니 그때 할머니의 기도가 우리 딸 무사하게 해달라는 간절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저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엄마 말고 또 누가 이렇게 날 생각해줄까. 엄마가 없으면 누가 날 걱정해줄까.
엄마 외에는 없을 것 같은 그런 존재를 이번 출산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유일하게 나의 선택으로 가족이 된 사람, 남편. 물론 엄마라는 존재에 비할 수 있겠냐마는, 내 옆을 지키며 내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또 있었다.
나는 진통 시간이 짧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진통은 강하게 왔었다. 고통 속에서 이성의 끊을 점점 놓아갔지만, 옆에서 남편이 했던 말과 행동들은 빠짐없이 기억한다. 떨리는 내 손을 꼭 잡아주던 손, 대신 아파 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눈빛. 그리고 혹여나 내가 잘못될까 울먹이는 목소리.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때 정말 나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고 한다. 탯줄 자르는 게 무서워서 안 하겠다고 망설이던 사람이었는데, 그것보다 내가 아파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한 시간이 더 힘들었단다.
그날 남편의 모습은 이 사람은 진짜 내 편이구나 느끼게 해줬다. 내가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 적어도 그 사람 세상에서만큼은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출산은 그저 아이가생기는 일인 줄만 알았는데, 언젠가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해 줄 남편이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