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이 떨어지는 어른이 된다
조선미 교수님은 부모 양육방식에 따라 자녀의 인생이 뒤바뀐다고 했다. 허용적 부모와 방임적 부모, 권위주의적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의 특징을 설명했다.
그중 방임적 부모에게 애정도 못 받고 통제도 못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감이 없다. "맞아, 그렇게 하는 거야. 잘하고 있어." 이런 말을 못 듣고 자란 아이는 끊임없이 방황한다. '이렇게 해도 되나? 이게 맞나?'
자신감이 없고 자율성과 독립심이 생기질 않는다. '이거 뭐 어떻게 하래?' 자연스레 남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애정을 못 받으니 자존감이 낮고, 통제를 안 받으니 자기 조절능력도 생기지 않는다. 결국 마음은 약한데 생산성이 떨어지는 어른이 된다.
전문가의 말에 아프게 공감했다. 나의 부모를 규정하기 전에 내가 살아온 인생을 보고 알았다. 나의 부모는 허용적 부모 같으나 방임적 부모였다. 애정이 없었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눈빛으로 보내는 애정이 있었다. 나는 그 눈빛에서 뿌듯함, 자랑스러움, 걱정, 근심 같은 것들을 읽었다. 그것들은 한 데 뒤섞였다기보다는 주기적으로 색깔이 변하는 무드등처럼 자꾸만 교차되는 느낌이었다.
나를 관찰한다기보다는 나를 통해 자신을 관찰하는 느낌. 내게 관심을 두고 하는 피드백이 아닌 자신의 감상에 따라 달라지는 눈빛들. 말이 없는 그녀는 자주 눈빛으로 애정을 표현했다. 나는 그 표현을 읽어내기 위해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물었다. 그러나 엄마는 늘 답이 없었다. 그러니 그 눈빛 또한 내게는 혼란스러움이었다.
한 전문가는 규칙을 만드는 것은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절제력을 기르기 위함이라고 했다. 우리 집은 규칙이 없었고, 따라서 통제도 없었다. 가정의 문화랄 게 없었다. 그 속에서 한 자녀는 많이 반항했고, 한 자녀는 많이 방황했다. 나는 방임적 부모 밑에서 많이 외로웠다.
노력하지 않는 한 자신이 양육받은 대로 양육하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떠올려본다. 알아서 크겠지 하는 마음, 제 수저는 제가 물고 태어나더라 하는 말들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 생각해 본다. 결국 아이는 알아서 클 것이다. 수저를 물려줄 수도 없다. 금수저를 물려주는 부모가 있다 한들 떠먹는 것은 제 몫이다.
그러나 아이가 지체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부모는 아이를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지지는 간섭이 아닌 관심, 관철이 아닌 관찰, 감상이 아닌 실제적 애정으로만 가능하다. 내 안에서 나왔지만 내가 창조하진 않은 존재, 내게서 물려받은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까지도 갖고 있는 신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라는 무궁무진한 세계 속에서 이미 발견된 나를 발견하는 것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아이의 잠재력을 발견해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주입식 교육으로는 불가능하다. 아이는 믿어주는 만큼 성장한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당연하게도 나의 결핍이 아이에겐 없길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강하고 생산성이 높은 어른으로 자라길 집중적으로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오래 허우적댔던 삶의 허방을 나라도 메우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가 동일하게 경험하지 않도록. 모든 길을 평탄케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아이에게 어떤 모습을 바라고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보다, 어떤 모습이 있는지 아이를 관찰하고 내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에 먼저 관심을 갖는다면 어떨까. 헛된 바람들은 결국 지나가지 않을까. 지나가지 않고 아이와 나 사이에 살랑살랑 머무는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소망이 될 것이다. 적어도 태풍에 휩쓸려가진 않을 것이다. 나를 잃지 않고 아이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헛된 바람에 실려온 씨앗이 아닌, 아이에게서 발견한 씨앗에 믿음을 준다면 아이는 필경 잘 자라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생명력 있는 씨앗도 뿌리를 내려야만 자라는 법이다. 꽃이든 사람이든 흔들리며 자라나는 게 당연하다지만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겪는 방황은 생명력과 직결된다. 나의 방임이 자녀의 방황이 되지 않도록 하고, 자유와 방임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