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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과 그늘이 만난 자리

그늘 아래서 발견한 아이들

by 조이


예전에 브런치에서 어떤 청소년이 물었다. 어른의 정의에 대해서. 그 글에 댓글을 달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놓고 나름대로 오랫동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문득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생각났다. 나만의 답일 뿐이지만. 그러니까 답이 아닌 그저 나의 기준일 뿐이지만, 징검다리를 놓듯 나는 이것을 밟고 또 한 다리를 건너갈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란 아이의 미숙함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마주하는 아이란 나의 어린 자녀가 될 수도 있고, 내 안의 내면 아이가 될 수도 있고, 동네에서 마주치는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아이든 나는 가끔 그 아이들 앞에서 초라해지기도 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무력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나라는 사람은 차가워지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유치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른이라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휘둘리고 흔들리는 순간, 평소에 고상하고 다정한 척했던 어른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다.


고상한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은 고사하더라도 유치한 어른은 되지 말아야 한다. 유치한 감정싸움은 아이들 사이에서 늘 있는 것이지만, 어른을 상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른은 아이에게 그런 상대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또래 사이의 갈등에서 겪게 되는 가치판단이나 마음의 생채기는 어른을 상대로 한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어린이는 어린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아무리 영악한 아이라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사고와 행동을 바로잡아주기 위한 훈육을 할 자신도, 때로는 (내 자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격도 없는 어른으로서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아이를 아이로서 바라봐주는 것. 감정의 표현이 미숙할 수 있음을 감안하는 것. 미숙한 행동으로 나타난 마음의 무늬를 곡해하지 않는 것. 그것에 영향을 미친 복합적인 요소들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부정적인 파장을 더하지 않는 것.


또한 그런 행동에 상한 나의 감정도 알아주는 것, 안아주는 것. 본디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것이니까 어른이든 아이든 다루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다만 나의 상한 마음이 또 다른 생채기를 내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는 것. 일찍이 상해버린 아이의 마음에.


아이의 심장박동수는 어른보다 빠르다고 한다. 어리면 어릴수록 그렇다. 그러잖아도 빨리 뛰고 있는 작은 심장에 부러 상처는 내지 말아야 한다. 어른의 심장을 가진 이라면 나보다 작고 어린 생명을 소중히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한 아이에게 다가서는 차인표, 신애라 부부의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따뜻한 어른의 눈빛과 손길, 말투에서 조심스러우면서도 수용적인 태도와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런 어른과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


동네 아이들을 통해 만나는 나의 내면아이는 여전히 방어적이고 소심하다. 마음이 상해 저런 아이랑 놀지 마,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다. 내 아이가 그런 아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라니, 나쁜 행동은 있어도 나쁜 아이는 없다고 일러주고선 저 아이는 '그런 아이'라며 편견을 가져버렸다. 한창 반항심이 가득하던 때 내가 우습게 보았던 어른의 모습이다.


제 생각 밖의 아이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조차 제대로 하질 않는, 제 아이밖엔 모르는 좁은 시야를 가진 어른들.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고, 상처받은 연약한 내면아이조차 고개를 젓는.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다. 성숙하다는 건 또 무엇인가. 충분히 자라 구별되는 것, 그리고 구별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내 안에 그늘진 마음, 이것은 나의 그늘일 뿐 너와는 상관없는 거라고.


그늘이 있어서 너를 더 잘 바라볼 수 있었노라고, 너는 그 자체로 찬란한 아이라고. 햇빛에 찌푸린 미간을 풀고 그늘 아래 싱긋 미소 지어 보일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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