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받아쓰기

내가 할 수 있는 사랑

by 조이


언니네 가족을 위해 기도하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새벽, 캄캄한 예배당에서 감은 눈 사이로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침에 남편이 jpg냐고 물었는데 움직이는 이미지였으니 gif라고 해야 맞겠다.


거대한 프레스가 움직이며 언니를 자꾸만 벽 쪽으로 밀고 간다. 언니는 있는 힘껏 프레스를 밀어대지만 속수무책이다. 밀리고 밀리다 짜부라질 때쯤 벽 쪽에 스위치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거대한 프레스는 다시 뒤로 밀려간다.


그것을 알기 전까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까. 힘이 빠질 대로 빠져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프레스에 몸을 기댄 채 벽으로 밀려오는 동안 얼마나 비참할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마음은.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마지막 순간에 프레스를 마주 보지 않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가 달려있던 그 벽으로. 그래서 스위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일이었던가. 현재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너무나 안타까워서 눈물이 났다. 엄마와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그곳에서 언니는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옆에 있는 형부는 또 다른 공간에서 또 다른 프레스와 씨름하고 있었다. 하나의 가정 안에서 언니와 같은 상황이지만 각자의 싸움이 있는 거겠지. 두 사람끼리도 맞설 때가 있을 테고.


그렇다면 나의 조카는 어디에 있나. 원형탈모가 생길 정도로 머리를 쥐어뜯는다던 나의 조카는. 보이지 않는 조카를 품에 안고 엉엉 울었다.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은 개가 큰 개를 보고 짖어대듯 강하지 않으면서 말이 세던 나의 언니. 무섭고 두려워서, 그러나 시끄러운 속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 성질을 버린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언니의 동생으로 사는 동안 많이 힘들었다. 동생보다 자식처럼 생각하고 위해주던 언니의 사랑이 있었지만 언제나 감각은 상처에 먼저 열리는 걸까. 사랑의 언어가 각자 다른 것도 있겠다.


짜증과 구박이 고스란히 조카를 향해 있는 걸 볼 때면 안쓰럽기도 했다. 언니도, 조카도. 우리 모두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지만 조카는 아직 초등학생일 뿐이니까.


언니의 염려 가득한 카톡에 나마저 휩쓸릴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면 언니는 비웃으려나. 그러나 하는 수 없다. 나조차 어찌할 수 없는 존재들을 향한 이 마음을.



* 사진 출처: Unsplash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문장카드로 소환하는 기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