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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떠난 소설에 대하여

by 조이


지난 4개월 동안 내내 함께 했던 소설이 나를 떠나갔다. 초고도, 최종 원고 파일도 노트북에 여전히 저장되어 있지만 출력해서 어디론가 보내고 나니 나를 떠났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다시 어디로 보내게 된다 해도 이번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보내기 전 한 번이라도 더 보게 될 테고, 그러면 한 글자라도 한 문장이라도 수정되겠지. 최종이 최최종이 되는 순간 나는 먼저 떠난 소설을 생각하며 아쉬울까? 헛헛한 마음을 쓰다듬으며 생각해 보았다.


아니. 그건 그때 나의 최선이었다. 그때의 내가 최선으로 쓸 수 있었던 글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를 떠나간 소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완성해보고자 하는 소망으로 쓰기 시작한 소설을, 막상 완성하고 나니 어디론가 보내주고 싶었다. 퇴고를 하면서는 보내주기 위해 완성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마태복음 5:41)는 말씀은 내게 늘 어려웠고, 그건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밀어내듯 나아가는 동안 겨우 한 문장, 한 문단까지만 동행하던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와 동행해 준 소설 속 인물들에게 감사한다.


특히 처음 구상할 때 인물 소개 노트에 적지도 않았던 캐릭터가 등장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소설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또 다른 주인공일 수도 있었던 그녀의 이야기는 A4 22페이지 분량에서 절반이나 덜어내는 동안 들어내야 했지만, 그녀의 서사는 내가 기억할 것이다. 오래오래.


지난주 만났던 친구에게 이런 소설을 썼고 어디론가 보내주려 한다는 말을 했다. 친구는 내용을 듣더니 이건 너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너라서 쓸 수 있었다고. 그랬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더없이 뿌듯했다. 어느 날 내게 찾아온 이야기의 씨앗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꽃 피울 수 있었던 건, 오늘날까지의 내 삶이 거름 역할을 했기 때문이겠지. 그러고 보면 살아온 과정에서 버릴 것 하나 없는 것 같다. 적어도 글을 쓸 때만큼은.


내 안에서 피어난 이야기를 불어 보냈다. 공중에 흩날린 씨앗이 또 어딘가에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러면 좋겠다. 그렇지 않대도 슬퍼할 이유가 없음은 나 또한 자연의 섭리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일 뿐이기에. 사장된 문장들과, 모든 기대들을 다시 묻어둔 채 훌륭한 거름이 되기를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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