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티타늄수저입니다 1
부모님이 물려주신 최고의 선물
어제 이직에 성공한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주제 가운데 결혼 이야기도 나왔고 친구는 부모님이 배우자감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 버겁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무엇이 되어라. 무엇을 해라.' 강요한 적이 없고 기대를 내비치시지도 않았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고3 때는 엄마가 해외여행을 장기간 다녀오시기도 했다. 이유는 있었다. 학부모 모임에서 자녀가 대학교에 입학한 기념으로 가신 건데, 나는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지내다 와서 한 해가 늦었기에 나만 고3이었다. 한동안 친구들이 자유방임주의의 끝판왕이라며 놀리곤 했다.
통금도 없는 편이어서 늦게까지 놀고 있으면 부모님께 전화 오는 친구에게 질투 아닌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나에게 크게 바라는 게 없는 건 내가 크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라는 오해를 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이런 오해를 불식시킨 계기는 내가 크게 실패했을 때였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면접에서 떨어져 보고 필기 컷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쳐 떨어져 보니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이렇게 준비하는 목적을 찾지 못했다. 나는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빨리 직업을 갖고 싶었다. 이유모를 조바심에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작정 시작했으니 빨리 지쳤다.
엄마는 어린 나이부터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연이은 탈락으로 실의에 빠져있는 나에게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이래? 주변만 봐도 마트며 가게며 학원이며 얼마나 일자리가 많니? 공무원 아니어도 넌 젊고 건강하니까 뭐라도 할 수 있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이 말이 너무나 큰 힘이 되었고 아쉬움 없이 공무원 준비를 포기했다. 결론적으로는 비슷한 직업군을 갖게 되었지만 그때의 빠른 포기가 빠른 입사를 만들어줬고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없애주었다.
두 번째로 감동했던 순간은 연애에 관한 조언을 해주실 때였다.
입사를 하고 소개팅 제의가 물밀듯이 들어와서 몇 개월 간 많은 소개팅을 했다. 직장인끼리의 만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몇몇 남자는 물어보지도 않은 부모님 직업과 재산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의 배경에 흔들렸다.
엄마는 이런 나를 보고 "부모 재산이 뭐가 중요하니? 요즘 같은 백세시대에 부모 재산은 부모 재산으로 끝날 경우가 많고, 혹시 내려온다 해도 마음고생 시작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축적하지 않은 재산으로 과시하려는 사람이 미덥지 못하다고 하셨다.
이모가 언젠가 나에게 너희 엄마는 대구에서 잘 나가는 집안과의 혼사를 물리치고 홀로 서울에 올라온 신여성(?)이라고 했다. 본인의 신념을 몸소 실천하고 나에게까지 물려주신 진정한 힙스터였던 것이다.
부모님도 충분히 알고 계실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중요하고 연애나 결혼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것을.
하지만 나에게 강요하지 않고 내심 기대를 내비치지 않은 건 내가 행복하길 바라셔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바른 길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셨던 것이다.
드라마를 통해 친구들을 통해 생각보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이상향을 강요하고 기대를 주입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부모님의 자유방임주의적 쿨함은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자 티타늄수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