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재밌어
젊은 날 한강에 나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워 손으로 머리가 젖지 않게 가리다가 어깨와 얼굴로 쏟아지는 빗방울에 허둥대다 큰 나무 아래로 피해 있었다. 처음엔 버틸만했던 나무 밑 효과는 나무가 큰 가지와 나뭇잎에 모아들었던 빗방울들을 보듬다 보듬다 갑자기 놓쳐버린 듯 더욱 소담스럽게 나의 몸에 부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쫄딱 젖었다. 어디 하나 건질 곳이 없었다. 버티기를 할 이유가 없어 그냥 걸었다. 천천히.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을 빼고는 오로지 내 한 몸뚱이만 있었다. 세상은 억수같이 내리는 소낙비와 나뿐이었다. 미친 듯이 쏟아붓는 세상 안에서 나는 평온하고 자유로웠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완벽하게 보호받는 듯했다.
오늘 아침 옷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훌렁 벗어던지고 목욕탕으로 들어간다. 샤워기의 온도를 맞춰 물을 틀어 놓고 잠시 기다린다. 연인을 기다릴 때처럼 두근거리지는 않는다. 그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작은 기대감이 있다. 손을 대본다. 지금이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샤워기의 타원형 물줄기 안으로 뛰어든다. 처음부터 좋은 건 아니다. 1초, 2초, 3초 정도 지나면 아, 스며드는 따뜻한 물줄기가 느껴진다. '어쩜 이리 매번 좋은 것이 이 세상에 있을까?'하고 감탄한다.
물줄기 속에서는 어떤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다. 가끔 샴푸를 했는지 잊을 때도 있다. 마음이 불편한 날이면 오롯한 빗줄기 속에서 나만의 상념들이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듯 갇혀 있기도 한다. 그 괴로움조차 오롯하다. 내가 물줄기 속에서 존재하는지 나의 상념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한 샤워는 끝나지 않는다. 머리를 흔든다. 털어버린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순간 다시 나의 물줄기 속의 세계는 샤워의 순서를 자각한다. 다시 따뜻한 물의 온도를 느낀다.
이 정도의 타율로 좋은 것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있을까? 바닷속에서 고래상어와 헤엄친 것. 원시림의 산꼭대기부터 계곡을 타고 몇 시간을 둥둥 떠내려오다 점프하다 헤엄쳐서 내려온 캐녀닝. 바닷속의 찬란하던 산호와 돌들과 물고기 떼, 특히 청어 떼. 거대한 호수 둘레의 숲 속 산책길에서 하루 종일 오로지 나만 걸었던 그 순간들. 제주 생이기정길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걷던 순간에 만난 엉겅퀴들. 바다 위에서 본 밤하늘의 별들. 흰구름이 있는 푸른 하늘.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지만 이렇게 가까이 손쉽게 내 옆에 있는 것은?
평온하고 자유롭고 완벽하게 보호받는 듯했던 그 빗줄기 속과 샤워기의 물줄기 속의 세상은 거의 언제나 좋은 것이었다. 거의. Almost. 그러나 백 퍼센트는 아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