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재밌어
"똥 쌌어요?"
"똥 쌌어요?"
새벽의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사의 큰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건너편 침대에 있는 할머니에게 아까만 해도 "대변보셨어요? 대변봤어요?"하고 연신 묻더니 급기야는 상냥하던 간호사가 응급실 전체에 울려 퍼지게 "똥 쌌어요?"를 외치고 있다. 보호자가 자리에 없던 그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시는 건지, 아니면 상황 파악을 못하는 치매 초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뭐라고 웅얼거리시기만 하고 답을 안 하신다.
나는 응급실 침대에 남편을 뉘어놓고도 픽 웃음이 나왔다. 남편도 아픈 것이 좀 진정된 때고, 그날 응급실은 조용하기까지 했다. 칸막이 커튼 안에서는 저마다의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라도 겉으로 느끼기에는 평온하던 그 공간에 크게 울려 퍼지던 '똥'이라는 원초적인 단어.
'똥 싸다'
이걸 점잖게 얘기하면 '대변보다'
참, 보긴 뭘 보나...?
'똥'은 순 우리말, '대변'은 한자어.
우리나라 역사 어느 순간부터 순 우리말은 낮춤말이 되고 한자어가 품격 있는 말이 되기도 했었다. 언어의 사대주의라고 비판도 했었다. 한때는 한자어가 실제로 품격이 있어 보이기도 하던 때가 있었지만 점차 한자를 쓰지 않는 시대가 되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자용어를 그냥 습관적으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아름다운 우리 고유어를 살리려는 분위기도 있었다. 가끔 방송에 나온 사람이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 용어나 외국어를 남발하는 것이 오히려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또 아니다. 유식해 보인다. 정말 왔다리 갔다리 간사한 감각의 변화다.
요즘은 어떤가? 신조어와 줄임말, 외국어가 대세인가? 방송에 나오는 줄임말의 조합을 알아내려고 하고, 그걸 또 외우려 하는 내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다. 요즘 줄임말 테스트의 결과 4단계 중 최고봉 '뻬박 으르신'은 되지 않으려고 애쓰니 말이다.
아무튼 아이들은 똥 얘기를 무지 좋아한다. 나도 그렇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릴 때에 똥 얘기를 많이 해줬었다. 언제나 즐거운 레퍼토리였다. 작은 포스트잇 한 장 크기의 종이로 똥을 닦을 수 있는 비법은 압권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커서도 여전히 그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나도 그렇다.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에게 '대변본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똥'이라고 하지. 하지만 크면 '똥'이라고 하지 못하게 한다. 점잖지 못한 단어라며. 어떻게 아이가 엄마에게 하는 단어가 점잖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엄마가 가르쳐 놓고서는. 친한 사이에는 똥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면서 남들 앞에선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한다. 그 사이엔 체면을 앞세운 가식이 자리한 것이 아닐까?
예전에 예쁜 여학생이 전체 앞에서 "똥 마려워요."라고 큰소리로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부끄럽게 왜 저렇게 표현을 할까 했는데, 누구나 평소의 습관대로 말이 불쑥 나오기는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때는 '똥'이란 단어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요즘 '똥'이란 단어를 잘 말하지 않는다.
'한자어를 좋아하나?'
'재미가 없어졌나?'
'어릴 적 기억을 잊고 가식에 쩔었나?'
우리가 한때 권정생의 <강아지똥>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개똥철학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베르너 홀츠바르트의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는 볼프 에를브루흐의 그림이 기억난다. 그 치사량에 가까운 귀여움!
<똥에 대한 관용구>를 몇 개 적어본다.
'똥을 뀌다.(방귀를 뀌다.)'
'똥을 밟다.(재수가 없다.)'
'똥을 싸다.(속되게-몹시 힘들다.)'
<똥에 대한 속담>
- 똥 누고 간 우물도 다시 먹을 날이 있다.(의미심장하다.)
- 똥 누고 밑 아니 씻은 것 같다.
- 똥 누는 놈 주저앉히기(오~! 이거 놀부가 잘하는 짓. 나도 사실은 아들을 키우면서 한 번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힘주는 녀석이 귀여워 머리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앉혀보고 싶은 충동을 미친 듯이 참았었다. 해볼 걸 그랬나...?)
- 똥 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요새 개가 뭐 묻히고 다니지 않는다. 특히 '겨'는!)
- 똥은 건드릴수록 구린내만 난다.
- 똥은 말라도 구리다.
-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이건 잘 써먹은 듯)
똥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았었는데 이제는 거의 잊어버렸다. 다만 똥이 나에게 여전히, 아니 오랫동안 재미있는 소재로 남아있기를 바랄 뿐이다. 간호사한테 "똥 쌌어요?"라는 말을 듣는 날은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