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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숙 라라조이 Apr 03. 2021

느리게 가는 트램, 빠르게 가는 인생

인도, 포르투갈 드로잉 여행기(2020.1,2월)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우리 일행이 9일 동안 빌린 리스본의 아파트 거실에는, 인도의 바라나시 골목에서 한 여인이 실종되는 소설을 쓰겠다는 원작가가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 거실에는 늘 누군가 돌아가며 밤새 불을 켜고 있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같은 방에 잠들어 있는 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어둠 속에서 재빨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바람처럼 현관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 아파트 입구의 커다랗고 무거운 철문을 밀어젖혔다.


‘후. 욱.’ 새벽 공기가 얼굴에 확 끼얹어지며 탈출의 기분을 맛보았다. 바다로 향한 언덕을 걸어 내려간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에 시원한 바람이 가득 차는 것 같았다. 그저 바닷가를 쭉 걷고 싶었다. 깜깜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곳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아직 깜깜한 거리, 뚫려 있는 길 어느 쪽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멈칫했지만 내달리듯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며칠 동안 그렇게 익숙하던 거리가 낯설게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이런 모습 처음이지?’ 하고. 익숙한 작은 광장에도 사람이 없었다. 광장을 지나쳐 바다로 향하는 오른쪽 방향으로 틀었다. 길게 뻗어 내린 길에서 어쩌다 새벽 출근을 하는 사람과 마주쳤다. 그리고 또 혼자 오래 걸었다.


언덕을 다 내려가서 끝 부분의 육교 아래로 보이는 골목 술집들엔 지난밤의 격정이 춤추듯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건널목을 지나고, 버스 정류장을 지나고, 또 길을 건너고 방파제가 있는 바닷가로 걸어갔다. 사실 건물이 없는 어둠이 무섭긴 했다. 그래도 바다인데, 하고 걸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이판사판 언제든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려 노력했다. 어릴 적부터 생각한 것이었지만 살아갈 날이 적어질수록 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면 어디를 여행해도, 어떤 상황을 맞닥뜨려도 두려움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닷가를 걷고 있는 내 뒤로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간격을 확확 좁혀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 새벽에 나처럼 바닷가 산책을 나온 것일까?’ 주변을 재빨리 둘러봤다. 저 멀리 방파제에 남자 두 명이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고, 아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남자 한 명이 있었지만 지금은 버스를 타고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바닷가를 따라 계속 걸으며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계속 걸어서 그 사람이 나를 지나가게 해야 할지, 아니면 그 사람이 눈치채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결정했다. 내 뒤편 가까이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 나는 갑자기 90도로 방향을 홱 꺾어 차도를 마구 건너 정류장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뛰다시피. 그 방향은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올 수 없는 방향이었다. 우리의 모습이 참 이상했지만 그는 그대로 바닷가를 걸었고, 나는 차도를 걸었다. 왜 무서웠지? 죽음도 무섭지 않다고 생각한 내가. 강도를 만나면 찬찬히 얘기도 나눠 보리라 생각도 한 내가. 사실은 가슴속에 두려움을 한가득 안고 살아가나 보다.


한참을 걷다가 내려간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왔다. 언덕을 올라 광장으로 갔다. 아직도 어둠에 싸여 상점들의 불빛은 켜지지 않았다.


나는 어제 탔던 트램을 기다렸다. 28번 트램. 한 칸짜리 기차같이 귀여운 노란 트램은 이른 아침에도 달렸다. 내가 탔을 때는 승객 한 명만 타고 있었다. 조금 있다 그 사람마저 내리고 나는 종점을 향해 달리는 트램의 운전수에게 모든 걸 맡기고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리스본의 트램, 전통을 함부로 버리지 않아서 그림과 사진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리스본의 전차는 느리게 가지만 재미있는 장면을 며칠 사이 많이 보았다. 전차의 전 기선이 이탈되었을 때, 기사는 승객을 내리게 한 후 뒤로 나와 긴 막대로 전깃줄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도르래 같은 작은 바퀴에 걸쳐 놓고 다시 운행을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트램을 멈추고 기사가 나와 바닥에 있는 선로의 방향을 바꾸어 놓고 바꾼 방향으로 운전해 가는 것을 봤다고 했다.


1차선으로 되어 있는 좁은 도로를 승용차와 트럭과 오토바이와 트램이 다 같이 사이좋게 다니고 있었다. 상점 앞에 트럭이 짐을 내리러 정차해 있으면 전차는 그 운전사가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렸다가 앞차가 빠지면 다시 가곤 했다. 급할 것도 없이, 화낼 것도 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승객들한테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느리게 느리게 가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승객들은 그저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되었다.


종점까지 갔다가 내려서 한참을 동상이 있는 정원을 산책하다 가 15분쯤 후에 다시 운행하는 트램을 타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듯이. 어둠에서, 동이 터오고, 날이 환해지는 걸 천천히 천천히 바라보았다. 형광 연두색 옷을 입은 젊은 미화원들이 모여 모닝커피를 마시며 활기찬 대화로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귓가에 들리는 그 소란스러움이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고 평화로운 마음까지 들게 하였다. ‘살아 있구나!’


전차는 느리게 갔다. 인생은 빠르게 갔다. 언제쯤 우리도 가다가 전차의 선로 방향을 바꾸듯 우리가 가는 길의 선로를 바꿔도 좋겠다. 그리고 가다가 고장이 나도 아무 말없이 기다려도 좋을 것이다.


리스본의 노란 트램, 빨간 트램, 장난감 같은 트램들이 장난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를 태우고 어디론가 느리게 가고 있는 것 같다.



넌 방금 바다에서 올라왔다. 푸른 물결을 뒤집어쓰고 <포르투갈, 리스본, 트램>

종이에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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