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8.15는 야외 수영장이었다. 그날 태풍이 불어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었다. 수영장에 함께 가기로 한 친구는 당연히 연기하는 줄 알고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그런 게 어딨냐'며 펄쩍펄쩍 뛰는 나의 오기 발동으로 수영복을 가지고 끌려갔었다.
야외 수영장은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하긴 그 당시 야외 수영장은 따로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수영장 안에서 서로의 새파래진 입술을 보면서 감히 먼저 나가자고 말을 하지 못하고 버티었었다. 번개가 쳐서 수영장 안에 있는 우리를 죽일 것만 같았다. 그 수영장 안에는 우리 둘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고 미안하다.
집에 오니 8.15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았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때는 어려서 정치가 무언지 독재가 무언지 모르던 시절이어서 그저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이메일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아이디라는 것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상징 같은 이름이라고. 조금 고심을 했다. 그때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8.15였다. 어린 시절 일제시대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본 탓인지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고 역사적인 날은 8.15였다.
그것은 그저 억압받던 우리나라의 해방, 광복이 아니라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어떠한 억압으로부터라도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진정한 존엄성과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상징으로 8.15를 넣고 그 기쁨을 표현한 단어를 넣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오늘 8.15. 엄마가 돌아가셨다. 엄마가 여자로 태어나서 살면서 오빠와 나를 낳았는데 돌아가실 때에는 자식이라곤 딸 하나뿐이었다.
나는 엄마의 묘도 만들지 않았다. 장례도 문상객을 정중히 사양했다. 자식이 하나 뿐이라도 문상객들을 철철 넘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부질없는 듯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가장 조용히 마음 깊이 엄마의 죽음을 새기며 경건하게 진심을 다해 보내드렸다. 세상의 의미도 잘 알지 못하는 의식들을 덧씌우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나의 의식으로, 내가 죽으면 꼭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보내드렸다. 그것을 엄마가 좋아하셨는지 아니면 싫어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싫어하셨어도 할 수 없다.
오늘은 8.15
나는 남산에 간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자주 가는 남산에 한 아름드리 벚꽃나무를 '엄마의 나무'라고 정해 놓았다. 오고 가는 산책길마다 엄마에게 인사한다. 오늘은 비가 온다. 늘 이맘때면 비가 왔다. 엄마에게 찾아가기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