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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숙 라라조이 Apr 11. 2021

남산에서 내려가는 길

남산과 나

하필이면 정일학원을 다녔었다.


대학을 떨어지고 재수를 하려고 했을 때, 엄마는 집에서 가까운 '여학생 학원'을 다니라고 했었다. 나는 대학을 떨어지고선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6년 간의 단발머리를 샤기컷으로 처음 자르고서는 내가 상상한 비주얼이 아니라고 거울을 보고 또 보며 울었었다. 6년의 순정을 빼앗긴 듯이. 가족들은 내 눈치를 보느라 대학 낙방에 대한 그 어떤 소리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내가 머리를 보며 대성통곡을 하는 걸 보더니 엄마는 기가 차서 혀를 '끌끌' 차셨다.


나는 엄마 말을 잘 안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남녀 분반을 해서 여중, 여고를 다녔는데 지금에 와서 재수학원도 '여학생 학원'이라니 말도 안 되지. 나는 남녀평등의 운동가처럼 남녀를 나누어서 교육하는 것에 반대하며 '정일학원'에 등록했다. 어쩜 그 학원이 남산 순환로 바로 아래 있어서였을까?


후암동 버스 종점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빙 돌아가는 완만한 길을 올라가든지, 왼쪽의 직선코스인 108계단을 올라가든지 한 번은 숨이 턱까지 차 올라야만 다다를 수 있는 학원이었다. 나는 자주 108계단으로 올라가며 나 자신을 힘들게 하며 인간의 번뇌 108가지를 생각하려고 애썼다. '나는 재수생이니까.' 하며. 그러나 마지막 계단은 오랜 세월에 주저앉아 107계단으로 셈을 마치게 했다. 그리하여 나는 108 번뇌를 다 헤아리지 못했었다.


그 학원은 아침에 들어와서 한 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는 룰이 있어서 밤늦게까지 자습을 하려면 어떤 유혹에도 밖을 나가지 말아야 했다. 다른 날은 다 참을 수 있었는데 봄날의 토요일 오후가 되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대학교에 간 친구들이 학원 밖으로 와서 재수하는 친구들을 위로하며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나가곤 하는 풍경들이 학원 건물 안 구석에서 바라보면 더없이 화사한 바깥 풍경이었다. 마치 나는 교도소 안에서 밖을 갈망하는 재소자 같았다. 나는 재수 기간 동안 일부러 친구들을 잘 만나지 않았다. 공부가 되든 안 되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원의 길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너무 관심이 가던 세상의 19살짜리 남자아이들과도 대화하지 않기로 하고 자꾸만 자라는 내 더듬이를 상상 속에서 수없이 잘라대곤 했었다. 처절하게 버티어낸 하루 끝에 학원을 나와 108계단 위에 서면 저 멀리 짙은 하늘이 위로가 되곤 하였다.


무르익는 봄이었다. 모두 저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학원 안에서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술렁임이 생겨났다. 서울에서 자란 나는 그 학원에서 전국 지방의 사투리를 엄청 신기하고 호기심 넘치게 듣고 있었다. 광주 아이라 했다. 집에 연락이 안 된다고. 전화통화도 안 된다고. 광주 출신 아이들 몇몇이 모이기도 하고, 모두 자습실 안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어두운 밤 텅 빈 로비에서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빨갛게 태우며 있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나는 담배의 빨간 불빛이 어둠 속에서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보고도 그 아이의 초조함과 불안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 불안은 전염이 되었다.


그즈음이었지. 모든(나에게는 대학에 들어간 모든 대학생들이라 느껴졌다.) 대학생들이 서울 시내에서 운집해 데모를 했다. 그날은 서울역에 너무나 많은 대학생들이 모여서 버스도 운행이 안되고 비상사태가 되어 학원에서는 학원생들에게 모두 집에 빨리 돌아가라고 내보내고 학원을 폐쇄했다.


나는 서울역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갈 수가 없어서 여차하면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가 알고 있는 남산 순환도로로 올라가서 다시 남대문 시장 뒤편으로 내려가는 남산 길을 걸어갔다. 남산 위에서 봤는지 내려가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때 내가 대학생 데모대를 보며 비상사태보다도 '나는 왜 지금 대학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더 분개하였던 것 같다.


그들이 정확히 무어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 푸릇푸릇한 청춘들이 저렇게나 모여서 피 흘리며 외치는 것은 '정의'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재수생이기 때문에 그 '정의'를 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더 서러웠다.


남산 길을 다 내려와서 어디에서였는지 무지막지하게 터진 최루탄으로 눈은 따갑고 쓰라리고 콧물과 함께 눈물범벅이 되었다. 난 그때의 눈물이 꼭 최루탄 가스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도 긴 시간이 흘러서 오늘날.

'정의가 뭐예요?'

하고 살고 있다. 나는 데모는 대학생이 아니어도 할 수 있고, 재수생이라도 충분하였으며 한 인간으로서면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냥 살았다. 가끔, 아주 가끔, 예를 들면 비공식적으로 열린 외신기자가 찍은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의 기록사진전'을 봤을 때처럼 가슴에서 무언가가 불끈 솟아나곤 했던 적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살았다.


늘 지금도 남산길을 걸어 내려오곤 하지만 그때의 그 최루가스는 내 시야가 아닌 내 맘속을 흐리게 만들곤 한다.


'정의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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