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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Aug 23. 2020

낯을 가리는 ENTP

나랑 친구 하기 어렵지, 그렇지?

첫 친구 다음으로는 기억이 없어요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내가 미취학 아동일 때로 돌아가 본다. 당시 90년대 후반의 아파트는 보통 복도식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저층은 주로 쿵쾅거리는 소음을 발생시키는 아이들이 있는 집이 입주해있었고, 우리 집도 비슷했다. 함께 어울리던 무리는 바로 그 2층 친구들이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여자아이와 나와 3살 터울의 내 동생,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자전거를 탔고, 롤러브레이드를 타며 아파트 주차장을 누볐으며, 눈이 오는 날에는 커다란 눈사람도 같이 만들었다. 그중 콕 집어 누구와 가장 친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한 뭉텅이로 어울려서 놀았다. 그때는 그렇게 이름 모를 동네 친구들과 편 가르지 않고 노는 게 당연했던 때였다.


유치원을 함께 나오고 초등학교 입학을 같이 했던 동네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다혜라는 이름의 친구였는데 부모님이 맞벌이셨던 터라 학교가 끝나면 친구네에 가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친구네 아빠가 미군부대를 자주 드나드셨던 터라 그 친구네 집에 가면 미국식 파티용품, 미국식 베이컨 등 미제가 가득했다. 친구네에 가면 오후 내내 베이컨 냄새를 맡다가 집에 오는 날이 많았다. 아쉽게도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진 않지만 다양한 색상의 모빌을 함께 만들었던 기억만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다혜는 유일한 내 친구였고,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는 존재였다. 그런 다혜는 2학년에 올라가면서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다. 그때 우린 핸드폰도 없을 때였다.


놀랍게도 그 이후 친구와 시간을 보낸 기억이 전무하다. 분명 주변에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어려웠던 내가 선택한 방법은 즐겁고 따스했던 기억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우는 것이었다. 4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성당을 신실하게 다니던 정민이라는 친구를 만나 짧게나마 친하게 지냈던 기억,  소희라는 친구네서 처음으로 라면을 먹었었는데 그 맛이 놀라웠던 기억, 6학년 때 엄마가 미용실을 했던 수인이라는 친구와 잠시 친했던 기억 정도가 그나마 생생하게 남아있다. 초등학교 졸업식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좋은 친구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면 즐거운 생활과 슬기로운 생활을 배운다. '친구를 도와줘야 해요, 친구와 다투면 안 돼요, 친구에게 양보해야 해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해요'는 배웠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했다. 친구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친구라면 어떤 감정을 나누어야 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배운 대로 잘 웃고, 잘 챙겨주고, 친절한 사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YES의 삶이 시작됐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친구에게 용기를 내어 친절하게 웃으며 다가가려 노력했지만 그 이후 조금이라도 어색함이 생기면 '나를 싫어하나, 나를 불편해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말 한마디 건네기 쉽지 않았다. 대체 절친은 어떻게 만드는 것이며, 그냥 친구들과 둥글게 지내는 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친구가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직접 집에 가서 그 준비물을 가져다주고, 허락을 받지도 않고 학교 앞에 있던 우리 집에 가서 쉬는 시간마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감고 가고, 샤프심을 사면 친구들이 빌려가는 통에 일주일마다 새로 사야 했었고, 엄마가 비싼 돈 들여 사주신 나이키 바람막이는 빌려간 이후 온데간데 사라지는 가운데서도 나는 YES 였다. 나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모두 낮은 편이었고, 주변 아이들은 그걸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그 당시 내가 그런 일들을 겪게 된 게 내 피해망상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지워놨던 기억들을 짚어봤지만 100% 피해망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친구들에게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며 지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친구가 좋아한다고 하면 지금부터 좋아하지 않을 거다 하며 양보하는 수준의 바보 같은 면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생각해도 입에 오르내리기 편한 아이로 여겨져 있었다. 여전히 교과서에서는 친절함과 양보가 미덕이라고 나왔고, 교과서에 나온 대로 지내기엔 너무 손해 보는 것이 많았다. 배우고 적용하고 실망하고를 반복했다 보니 많이 슬프고, 무기력한 날들이었다.



친구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먹구름 가득했던 중학생 시절이 끝나고 (역시 졸업식은 기억나질 않는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오니 중학교 때의 모습은 저 뒤로 보내고, 발랄하게 친구들을 새로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실제로 3명의 절친한 친구가 생겼다. 보통 4명이 함께 다니면 2명씩 짝지어 다니게 된다.  남자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전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지만, 여자라면 공감할 부분일 거다. 넷이서 즐거운 이야기를 하더라도 소인수 분해하듯 어떤 이야기들은 둘만 아는 비밀이 되곤 한다. 이 4명의 친구 중 1명이 신종플루로 인해 수학여행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친구 4명이 친구 2명씩 나누어지듯 친구 3명은 친구 1명과 친구 2명으로 나누어진다. 한 명의 친구가 못 와서 아쉽다는 2명의 이야기에 조금 늦게 리액션을 한 게 화근이었다. 수학여행에 다녀오니 나는 '인정머리 없는 애'가 되어있었다. 4명이 주도하던 우리 반이었는데, 모두가 나에게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중학교 때와 같은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아 나는 교실 밖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 탈출구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따로 모여있는 '특별반'이었다. 그렇게 전교 80등을 전전하던 나는 단번에 10등 안에 들어버리고 특별반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며 학교 내 숨 쉴 틈을 만들어놨다. 이미 도끼눈이었던 친구들은 그마저도 '독한 애'라고 손가락질하며 반 친구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친구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다행히 고등학교는 모두가 대학교 입학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입소문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게 특별반에 들어가며 생긴 용기로 반장에 도전하게 된다. 모 아니면 도였다. 스펙 때문도 아니었고, 그저 나 같은 애가 없는 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놀랍게도 반장이 되어 한 학기 동안 반 친구들과 둥글게 둥글게 지냈다. 내가 이끄는 반은 아니었고, 성격 좋은 친구 몇 명이 이끌어준 반이었다.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나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호시절이었다.


2학년 때의 친구들을 잘 모아서 끝까지 갔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3학년에 올라가면서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줄게 되어서 2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 멀어졌다. 친하게 지내는 법까지는 아등바등하며 알아냈어도 친하게 오래 지내는 법은 잘 몰랐다. 문학반이다, 논술이다 이래저래 활동을 한답시고 홀로 바쁜 3학년을 보냈고, 졸업하는 날 어색하게 서로 졸업을 축하해줬다. 졸업식 날 사진을 찍고 나서 고등학교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지방에 내려가서 학교를 다닌다는 핑계로 고향에 대한 모든 기억을 리셋했다.



우리 사이에 대한 자기 합리화


고속도로를 보면 보통 4개의 차선이 있는데 1번 차선과 4번 차선의 차들은 아주 빠르거나 느리고, 2번과 3번 차선의 차들은 비슷한 속도로 달린다. 스무 살 이후 내 생활은 1번이거나 4번 차선의 자동차였다. 빠르게 달리다가 지치면 잠수 정도의 쉴 시간을 찾고, 또다시 빠르게 달리고를 반복했다. 대학교 생활 내내 학기마다 빼곡하게 대외활동을 하고, 연애를 하고 남는 시간에 책을 읽었다. 연애가 끝나면 친구들을 만나고, 연애가 시작되면 인간관계가 끊겼다. 어느 날엔가는 '생각처럼 자주 연락하진 못해도 늘 잘 있으려니 여기고 조바심 내지 않는 우리 사이의 담백함을 사랑한다'라는 문장을 보고 내 일상을 합리화했다.


그렇게 3년 반을 보내다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생 때는 좋든 싫든 사람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외로울 새가 없었는데 서울에 와서는 일을 할 뿐, 함께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다. 그래도 자유로운 회사였던 덕에 먼저 다가와준 몇몇 사람들과는 가볍게 서로를 알아가며 지냈다. 적당한 온도의 사람들과 적당한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엔가 회사 사람들과 랜덤으로 밥을 먹게 된 날이 있었는데 사내에 인싸라고 소문난 동료가 내게 한 마디를 건넸다.


"샐리는 정말 사람이 밝고 다가가기 쉬운데 조금만 다가가면 벽이 좀 있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벽치는 성격이 있는 거 알지?"


그 말에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  아 저 사람은 나를 파악해버렸구나, 정곡을 찔렸다.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그 모습을 감추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 더 살가워지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는 꽤 감성적인 데다 외로움이 너무 많아 흘러넘치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연약함을 드러내기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잘 웃고 자주 시끄러웠다. 사람에게 마음을 기대는 걸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성취나 성공에 기대어 회사생활을 했다.



낯 가리는 활기찬 사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과 만날 일이 잦아졌다. 한 학번 위로만 가도 깍듯하게 언니, 오빠, 선배, 선생님 등 호칭으로 거리를 둬야 했었는데 사회에서는 때로 위아래로 서너 살 차이는 친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첫 만남에 생글생글 웃으며 상냥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내 모습이 나쁘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내게 꽤 호의적인 편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도 좋았고, 내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드디어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이 생겼다는 기쁨과 함께 부담스럽지 않은 그들과 잔잔하게 지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꽤 많이 찾았다. 뭔가를 같이 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내게 고민을 상담하는 사람도 있었고, 잔뜩 마시고 즐기러 어딘가로 놀러 가자는 사람도 있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사람들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는 시간이 좋았다. 내 시간을 줄여가며 모든 요청에 응하니 그다음 사람, 그 다음다음 사람까지 줄을 섰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려워졌다.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면 갑자기 심장이 두근대서 목소리가 떨렸다. 일찍이 에너지가 소진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른이라면, 응당 내 나이라면 이 정도 중압감과 불안감은 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런 나를 외면하고 계속해서 사람들과의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멈춰 섰다. yes맨은 no, I'm sorry를 외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듭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건 은근하게 스트레스가 됐고 찜찜한 마음에 사람들을 피해 집-회사-집-회사를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다.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좋은 건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나는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구나'로 일단락하고 화살을 내게 돌린 뒤 완벽하게 내 동굴로 들어갔다.



갑자기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굴에서 1년 간 사람들의 동향을 살피며 내게 집중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생각했으나 역시 입체적인 사람인지라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나를 정의하기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팠지만 실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엔 아직 마음이 힘겨웠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웬 드라마 람 싶을 수 있지만 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고 듣고 이해하는 게 어려워 긴 호흡으로 관계를 풀어나가는 드라마를 한 번도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책이나 영화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지만 드라마는 이상하게 4명 이상 인물이 나올 때 집중력이 흐려졌다. 드라마 내용 외에 사람들 간의 관계에 집중하며 단편 드라마부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해서 저런 배려를 받는구나, 이런 사람이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사람과 사람 간의 분위기를 익혔다.


그렇게 드라마를 보 다보다 단순히 사람이 싫었던 게 아니라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지쳤었다는 걸 깨달았다. 드라마 주인공의 주변에는 다채로운 군상이 나타나는데, 어떤 사람을 대하든 하나의 성격으로 대하는 게 눈에 띄었다. 난 그동안 가볍고 휘발적인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누구에게든 일관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그때그때 다른 행동을 하게끔-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격과 성향대로 행동 가게 끔- 했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내 주변에 나를 긍정적으로 봐주는 사람들이 보였다.



동굴 바로 바깥에는 친구들이 우르르 있었으면


돌아보니 내 주변엔 내게 깊은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학교 시절 타지에서 온 내게 엄마이자 친구를 자처했던 친구들, 매달 서로 간의 생사를 확인하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모이는 홈파티 친구들, 대외 활동을 하며 만난 친구들, 내가 정말 아꼈던 직장 동료들 등 열댓 명 정도 되는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나는 대체 왜 이들의 생일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걸까. 혹은 생일만 챙기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았던 걸까.'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그 날, 아무 날도 아닌데 떠오르는 친구들에게 넌지시 연락을 보냈다. 잘 지내? 잘 지내니? 잘 지내고 있어? 요즘은 좀 어때? 지난번에 그 일은 잘 해결됐어?. 가볍게 한두 마디 건네는 것도 굉장히 어색했다. 이후 속속들이 오는 답장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날 받은 연락들로 드디어 내 힘으로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을까 겁내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는데 예상치 못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응원해줬다. 그래서 이번엔 마음에 생긴 공간들에 차분하게 사람들을 채워보기로 했다.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서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합리적으로 거절하는 방법, 내 선택에 조금 더 힘을 싣는 방법 등을 계속해서 생각해나가기로 했다. 다시 관계에 지쳐 쓰러지는 날이 없도록 분기에 한 번씩 아름다운 내 사람들에게 물도 주고, 가끔은 내가 물을 받기도 하면서. 다가오는 날들에도 살뜰하게 나와 내 사람들을 챙기다 보면 어느샌가 좋은 꽃밭이 일궈져 있지 않을까?


며칠 전 읽었던 책에서 발견한 예쁜 한 문장과 함께.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는 건 인생이 혼자이길 바래서가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채운 에너지로 더욱더 즐겁게 함께 지내기 위해서다. - 내가 멸종 위기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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