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포물선을 그리듯 소리의 출렁임이 낮아지도록 의도하며 글을 읽었다. 뭔가 애씀이 들어간 걸까, 뒷목이 뻣뻣해져 왔다. 순간 고개를 숙이고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책을 눈 위치까지 들어올려 읽기 시작했다. 차츰 당겨졌던 뒷 목에서 이완감이 일어났다. 목소리가 전보다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알맹이가 없는 듯 하고, 딱히 맘에 들지 않는다. 내가 듣는 나의 목소리와 남이 듣는 나의 목소리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내가 듣는 나의 소리는 내 얼굴의 안쪽 공간을 울리며 들리는 것이고, 타인이 듣는 나의 소리는 내 얼굴 밖의 공간을 울리며 그의 얼굴 안 공간으로 들어가 그의 몸안을 울리며 들릴테니 어찌 그 소리가 같겠는가. 남이 보는 나의 '맨'얼굴은 만져 알 수 있다지만 나의 두 눈으로 내 '맨'얼굴을 볼 수 없듯이, 남이 듣는 나의 '맨' 목소리도 나는 들을 수 없어 나의 목소리가 타인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진정으로 알 수 없다. 소리도 이러할 진데,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타인의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것도 또한 얼마나 먼 일인가.
글을 읽을 때, 특정 몸에 주의를 두며 읽곤하는데, 오늘은 주의를 두는 몸의 부위를 바꾸었다. 이전에는 뒤 꼬리뼈에 주의를 두고 그 부위에 앉아 글을 읽는다고 여겼다면 오늘은 그보다는 약간 위쪽, 허리 부근 척추 앉아서 글을 읽는다고 여기며 낭독을 이어갔다. 그러자 소리에 좀더 힘이 차올랐다.울림도 더 커졌다. 그런데, 부드러움의 느낌은 떨어졌다. 힘은 들어갔지만, 스며드는 느낌은 낮아졌다. 울림이 커지자 발음이 뭉개졌다. 울림이 커질 때는 발성기관이 크게 움직이도록 부지런히 턱과 혀를 움직이여서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것이 필요했다.
소리에 마음두는 낭독명상을 10여일을 넘기자 끊어 읽기는 위치가 길어져도 무난히 한 번 의도록 읽게 되는 것 같다. 긴 글의 문장 구조도 읽음과 동시에 펼쳐보이는 듯해서 읽으면서 이해하는 것이 더 향상된 것 같다.
울림은 낮아지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소리 상태는 마치 오늘 나의 마음 같다. 한 해가 물러가고, 또 다른 이름의 한 해가 들어오는 12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전. 따스한 겨울 햇살이 흰색 커튼을 더욱 희게 만들고 있다. 부드럽고 하얀 햇살에 눈을 부시며 내년에는 좀 더 힘차게 도전하며 살아보리라..하는 마음이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들어난다. 내가 그리워하는 나의 소리를 찾는 여정은 소란스러운 지금의 마음을 지나 그 끝 자락 어디메에서 끝나리라. 소란스럽고 부잡스런 이런 마음의 그 끝은 과연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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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오늘 낭독이 길어올린 저자의 한 말씀이다.
"글쓰기에도 커다란 들판이 필요하다. 너무 고삐를 세게 잡아 당기지 말라.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아무 이름도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길을 헤맨 다음에라야 당신은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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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이름도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길을 헤맨 다음에라야....' 이 구절이 크게 와 닿는다.
아무 이름도 없는 곳에서 누구의 눈길도 없이 노란 알맹이를 하얗게 애워싼 데이지 꽃이 그의 몸줄기 끝에서 차올라 피어나듯, 아름다운 나의 삶도 아무 이름도 없는 곳에서: 외롭고 긴 몸부림의 끝자락에서 차곡이 차올라 피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