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집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진다. 하지만 오늘은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탁구 레슨날이니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일단 집을 나서면 또 시간은 흐르고 땀도 흐르고... 탁구장까지는 무려 6번의 횡단보도 신호등을 건너야 하지만 이중 2번 정도는 타이밍이 좋으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건널 수 있다.
몇 번째 신호등이었을까. 잠시 멈춰 서서 초록불로 바뀌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옆에 서있던 남학생 두 명의 움직임이 뭔가 부산했다.
'이거 이거 어떡하지?'
'네가 좋나 보다. 꼭 붙어 있는 걸 보니...'
덩치는 커다란 남학생들이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모습이 귀여웠다. 가만히 보니 한 학생의 왼쪽 반팔 소매 끝에 손톱만 한 벌레가 붙어있었다. 벌레가 아니라 곤충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조용히 다가가자 그 학생은 난생처음 보는 내게 왼쪽 팔을 맡긴 채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라도 되는 듯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한큐에 벌레를 날려 버렸다.
순식간에 공포와 긴장이 풀렸다.
'감사합니다.' 키가 나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학생이 인사를 꾸벅했다. 순간 평범한 아줌마는 영웅이 되었다.
2.
하와이 오아후(O'ahu) 섬의 알라와이 커널(Ala wai canal)은 인공 수로로써 관광지로 유명한 와이키키에서 산책하거나 조깅하기에 좋은 곳이다. 그런 줄 알았다. 그 길을 뒤덮은 바퀴벌레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엄지 손가락만큼 큰 바퀴벌레 반, 이미 밟혀 죽은 바퀴벌레가 반이다. 그야말로 바퀴벌레로 바글바글했다. 살아 움직이거나 이미 죽은 바퀴벌레를 피해 걷기란 여긴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난이도 극악의 퀘스트 깨기 같았달까.
아들 종범이와 딸 진이도 곤충 공포증이 있다. 와이키키 근처에 아파트를 구해 이사를 마치고 한숨 돌리던 차에 욕실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들이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하얀 세면대 배수구에서 쑤욱~ 대형 바퀴벌레가 기습 출현한 것이다. 딸아이는 미술용품이 담긴 가방을 열다가 놀라 뒤로 넘어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혹은 쓰레기를 버리다가도, 언제 어디서 등장할지 알 수 없는 바퀴벌레 때문에 낭만의 하와이는 공포의 섬으로 바뀌었다.
최근 아들이 직장에서 가까운 오피스텔을 구할 때 우선 조건으로 삼은 것이 '벌레가 없어야 한다.' 였다고.
3.
사실 나도 벌레... 그중 바퀴벌레를 엄청 무서워한다. 어릴 때 살던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타나면... 나는 순간 '얼음'이 되어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오빠가 '땡'을 해줄 때까지...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는 읽고 있던 책을 던지기도 했는데 이건 비추다. 설사 명중한다 해도 뒤처리가 곤란하고 명중을 못하면 언제 또다시 나타날지 몰라 밤새 불안에 떨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큰 오빠는 바퀴벌레 종결자였다. 큰 바늘을 들고 와 그냥 찔러 버렸다. 그리곤 확실한 처리를 위해 연탄불이나 가스불에 화형식까지 치러 주었다.
4.
작년 추석에 가족들과 만나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벌레가 나오자 우리는 멘붕 상태에 빠졌다. 나와 남편, 진이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인 셋째 새언니... 이렇게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벌레는 하필 진이 쪽에서 등장했던 것.
진이 : (멘붕상태)
남편 : 냅킨으로 잡아~!
나 : (냅킨이 어디 있지...)
그러던 그때!
셋째 언니는 조용히 밥뚜껑을 들더니 벌레 위에 엎어 버렸다. 벌레는 갇혔다. 종결.
이후 아무도 밥뚜껑에 갇힌 벌레의 생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테이블을 치우시는 분이 밥뚜껑을 들어 올리다가 얼마나 놀라실까? 상상만 해도... 꺅! 상상이 실제보다 선명한 게 탈이다. 곤충 공포증이 있는 분이시면 어쩌지... 하고 마음이 쓰였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 문집에 실린 '벌레'라는 시를 읽고 감탄을 했다. 그 시 전체의 내용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시작 부분 첫 행이 잊히질 않는다.
"내 시간 속에 침투한 벌레 한 마리 때문에
난 지금 꼼짝을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