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이라는 말이 어쩐지 불편하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단어가 마치 인간을
'위대한 자'와 평범한 자'로 이분화해 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마치 어떤 삶은 우러러봐야 하고, 어떤 삶은 기록조차 필요 없다는 듯 무언의 선 긋기를 한다.
역사는 늘 영웅을 원했고 영웅의 그림은 실체를 윤색해 완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들의 삶도 크고 작은 모순과 갈등, 실패와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단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삶의 어떤 국면에서 사회적 조명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일 뿐이다.
위인전은 그 빛을 확대해 기록했을 뿐, 그림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이끈 정신적 지도자이자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다. 그는 소금 행진을 통해 제국주의에 맞섰고, 수많은 민중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면 놀라운 이면이 드러난다. 그는 순결의 실험이라며 10대 소녀들과 함께 나체로 잠을 잤으며, 이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윤리적 논란거리다.
그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그의 가족은 늘 그의 관심 밖에 있었다. 간디의 아들은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오랜 갈등을 겪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위대한 선택을 했지만, 한 개인의 삶으로 보면 부족하고 왜곡된 선택을 한 순간도 분명히 존재했다.
마더 테레사 역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헌신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돌본 그녀의 삶은 교과서 속 '성자'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본 이들은 다른 모습을 증언한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들에게 진통제조차 제공하지 않으며 '고통 속에 신이 있다'라고 했고, 투명하지 않은 기부금 사용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는 영적 허무에 오래 시달렸다는 고백은 하나의 진실을 보여준다.
위대한 얼굴 뒤에는 인간적인 흔들림과 의심, 그리고 때로는 잔인함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완벽한 '위인'으로 떠받들 것인가, 아니면 이중적인 얼굴을 가졌다는 이유로 폄하할 것인가?
답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위인'이라는 말 자체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위인은 없다.
이름을 남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 있을 뿐.
그리고 이들의 본질적인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소리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
자식의 손을 놓지 않고,
아픈 가족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누군가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사랑하며, 따듯한 위로를 건네는 당신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다. 당신은 누군가의 딸이고 아들, 부모이자 친구이며 동료다. 당신은 책에 실리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기억 속 어딘가에 살아 있다.
이제 '위인'을 소비하는 방식을 멈추어야 한다. 삶은 '위인'과 같은 우상이 아니라 나와 같은 평범한 이들이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빛난다. 그리고 그 빛은 기록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위인은 없다.
오늘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내는 모두에게 전한다. 리스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