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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말하지 못한 미안함, 고마움

내 옆을 지켜주신 분들께

by Joyce 노현정

6년전 오늘 10월 8일에는, 부모님께서 한국에서 미국으로 나를 보러 로스엔젤레스 LAX 공항에 도착하셨다. 그때 나는 병원의 두번째 입원 수속을 마친 직후였다. 9월 말 첫 번째 퇴원 후 병원의 다음 진료일이 스케줄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걸려야 했는데, 나의 중증근무력증 증상이 급격히 나빠졌다 보니 미국에서 늘 나를 돌보아주시던 이모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내가 다시 입원할 수 있도록 애쓰셨다. 미국 유학생활동안 이모의 은혜가 너무 컸는데, 나는 또 한 번 더 이모께 은혜를 입었다.


내가 미국에서 지낸 시간이 무려 14년이었지만, 아빠에게는 2019년 10월 그때가 미국 첫 방문이었다. 내가 한국을 자주 방문하지 않았기에 엄마와 막내 남동생은 몇 년에 한 번씩 나를 보러 미국에 방문한 적 있었는데, 늘 바쁘게 성실히 일터를 지키신 아빠는 미국에 짧은 관광 한번 오실 기회가 없으셨다. 그 당시 나는, 2014년 한국방문 때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이후로 5년 동안 아빠를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빠가 많이 그리웠지만, 그래도 계획되어있는 2019년 11월 결혼식이 다가오면 아빠가 기쁜 일로 미국에 처음 오시겠구나 라는 마음으로 기다렸었다. 그런데 병으로 꼼짝할 수가 없는 나를 보러 아빠가 오신다니- 나는 병원에 누워서 부모님이 곧 도착하신다는 소식에 너무 반갑고도 마음이 아렸다.




두 번째 입원을 했던 그해 10월의 둘째 주 나는 극심하게 아픈 상황이었다. 기존 증상들에 새롭게 더해진 것들 중에는, 우선 흉선종이 너무도 커졌는지 옆의 폐를 계속 건드려서 기침을 심각하게 했다. 한번 기침이 시작되면 4시간가까이 멈추지 않았고 하루에 3-4번씩 그런 일이 발생했다. 몇 시간동안 오래 기침을 한다는 것이, 사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인 줄은 이전에는 몰랐었다. 기침을 하느라 흉통에 계속 힘이 들어가니 상체는 몸살을 하듯 아프고 목은 다 쉬었다. 기침하는 동안 말 하거나 소통하는 것은 물론 호흡도 어려워지니 그 당시 호흡근이 약한 나에게는 기존의 아픔이 몇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몸을 파괴하는 자가항체 때문인지 피부의 가려움이 말도 못 하게 심했고, 힘이 빠진 눈의 근육 상태도 더 나빠져서 모든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복시 (double vision)가 되었다. 호흡이 어려운 증상도 더 나빠졌다. 힘이 빠져버리니, 몸 안에서 아주 조금씩 자연적으로 생기는 호흡기 점액 (respiratory mucus)조차 기침으로 제거할 수가 없었다. 내게는 그 아주 작은 점액들이 마치 폐와 기관지를 가득 덮은 두꺼운 그물처럼 느껴졌고, 나는 호흡을 들이마실수 없어 코를 통해 목안으로 suction을 넣어 여러 차례 제거해야 했다.


부모님이 오셨다

여동생이 혼자서 부모님을 공항에서 모시자마자 아빠 엄마는 짐도 풀지 않으시고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려왔다. 아빠는 나에게 왜 여기 누워있냐며 오시자마자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내가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너무 죄송하고 마음 아팠다. 하지만 너무 약해진 그때의 나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냥 그분들의 존재에 의지하며 힘을 낼 수밖에. 아빠는 일주일 휴가를 내어 미국을 오셨다. 엄마는 나의 병을 간호하려고 조금 더 긴 시간을 준비하여 오셨다. 내 몸상황이 어떤지 듣고 오신 엄마는 하나라도 나에게 편한 것을 제공하시고 싶어 피부가 덜 가렵도록 도움이 될만한 이불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오셨고, 나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부터 부모님과 여동생의 병간호 교대가 시작되었다. 몇 주동안 나를 밤새 간호하던 여동생은 부모님이 오시자 그제야 마음의 긴장을 조금 놓았는지 며칠 심한 몸살을 앓았다.


흉선종에서 열심히 뿜어져 나오고 있는 몸 안의 자가항체를 없애기 위해, 의사들은 나에게 혈장교환술을 권했다. 혈장교환술은 체내 혈액을 큰 기계를 통해 몸 밖으로 빼낸 뒤, 자가항체가 포함된 혈장을 걸러내고 정화된 혈액만 다시 몸속으로 넣는 치료 방법이다. 치료가 한 번 진행될 때마다 목으로 연결된 관을 통해 피가 나오고 다시 주입되는데 평균 3~4시간이 걸렸고, 그 당시 나에게는 그 또한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3시간 이상 혈장교환술을 진행하고 보면 아주커다란 비닐백에 나쁜 자가항체만 남은 것인지 탁한 액체가 가득 찼다. 모두가 내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며 희망을 걸고 혈장교환술진행들을 함께 지켜보았다. 나의 젊은 나이와 발병시점이 아주 최근인 것을 고려해 4번의 혈장교환술이면 충분할 거라고 병원에서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계획했던 4번을 다 끝내도록 나의 몸은 크게 차도가 없었고, 의사들의 염려 속에 3번의 혈장교환술이 추가로 더해졌다.


내 옆을 지켜주신 분들

참 이상하게도, 그렇게 멈추지 않는 기침은 낮에 두세번 겪고 나면 매일 밤 새벽 2시에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커진 흉선종이 더 크기 위해 애를 쓰는 마냥, 꼭 새벽 2시 그때에 나를 기침으로 잠 깨웠고 나는 한밤 중 새벽부터 해가 동틀 때까지 몇 시간씩 기침을 해야 했다. 병이 발견된 후로 계속 잠을 자기 어려웠던 나는 잠을 푹 자보는 것이 정말 큰 소원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너무 피곤하니 꾸벅꾸벅 졸면서 기침을 하다 지치기를 반복했던 듯 하다. 그리고 너무 죄송하게도, 나를 간호하는 우리 가족은 새벽 2시부터 함께 일어나서 나를 계속 지켜봐야 했다. 마침 그해 10월에는 외할머니께서도 팔순을 맞아 미국 외삼촌댁을 방문하신 상황이라 나의 투병을 옆에서 지켜보고 계셨다. 할머니께서 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여러 번 청하셔서 하룻밤 병간호해주신 적도 있으셨다. 그해 여름 미국에서 외할머니의 팔순잔치를 기쁘게 함께 했었는데 - 병으로 드러누워 할머니께 염려를 끼치는 나 스스로가 너무 죄송했다. 바쁘신 삶이 있으신 이모와 외삼촌도 매일 병원에 오셔서 나의 상태를 살피며 간절히 나의 차도를 바래주셨다. 신앙심이 깊으신 외삼촌과 삼촌가족모두는 내가 병마와 이길수있게 절절하게 기도해주셨다.


그해 11월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예비시댁 어른들께서는 미국 방문을 위해 비행기 티켓을 일찍 예매해 두셨었지만, 나의 건강과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 속에 비행기표를 모두 취소하셔야 했다. 결혼도 하기 전 이렇게 건강 때문에 염려를 끼치다니..... 예비 시아버지 시어머니께, 그리고 아직 뵙지 못한 예비 시누이들께, 내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른다. 그때 한국에서 한의사로써 50여 년 넘게 환자들을 돌봐오신 예비 시아버지께서는 약혼자를 통해 이런 말씀을 전해주셨다, 병은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니, 나 또한 이 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예비 시아버지의 그 말씀은 나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었고 나는 투병기간 내내 그 말씀을 잊지 않았다. 병원에서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약혼자는 틈틈이 시간이 될 때마다 먼 거리를 달려와서 나를 보고 다시 달려갔다. 아파서 꼼짝 못하는 나를 하루하루 바라보는 그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 이 글을 쓰며 그의 마음을 다시 헤아려보게 된다.


10월의 중순이 되었고 나의 생일이 다가왔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나의 생일이 얼마만인지 세어보니 7년 만에 처음이었다. 나는 병원 입원실에서 조촐하게 약혼자와 부모님, 여동생으로부터 생일 축하를 받았다. 눈꺼풀이 잘 떠지지 않아 눈에 힘은 없었지만 나는 그래도 많이 웃으며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새로운 증상들과 싸우면서 버틴 10월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다. 일주일 휴가를 내서 오셨던 아버지는 다른 어떤 곳 한번 방문하시지 않으시고 일주일 내내 꼬박꼬박 출퇴근 하시듯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만 지내셨다. 드시는 음식도 늘 미국식으로 나오는 병원 식사였다. 그렇게 허락된 소중한 일주일 동안 아빠는 내 옆을 지켜주셨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 밤에도 아빠는 기침을 연신 하는 내 옆에서 밤새어 간호를 하신 후, 다음날 아침 일찍 출국 비행기에 오르셨다, 내가 나아진 모습을 보러 곧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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