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증근무력증 위기‘
나는 10월을 가장 좋아한다. 예쁜 가을, 선선한 날씨, 연말이 오기 전 차분한 분위기. 게다가 나의 생일도 10월에 있기에, 어린아이 같은 이런 마음까지 더해 나는 10월을 유독 좋아한다. 매년 10월은 나에게 설레는 시간이었지만 6년 전의 10월은 내 삶에서 신체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한 달이었다. 내 생일이 오기 전 나는 건강해진 모습으로 병실을 박차고 나오고 싶었지만 그것은 그저 나의 한낱 바람일 뿐, 9월 26일 중증근무력증을 진단받은 후 10월 한 달 내내 나는 너무도 약해졌다.
그래서, 그동안 2019년 10월을 글로 써보는 것은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고통을 되짚어보는 것도 마음적으로 어려웠고 내가 올바르게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기억을 따라가다가 그해의 10월쯤에 다다르면 그때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몰라 항상 이쯤에서 글쓰기를 멈추었다. 9월은 순간순간이 생생하게 남아있지만, 10월은 6년 전 투병당시 틈틈이 기록해 놓은 짧은 노트들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게 될 것 같다. 감사하게도, 그해의 10월 때문에 글쓰기를 오랫동안 주저한 나였지만 - 글을 쓰며 그때의 기억을 더듬다보니 어딘가 쳐다보지 못하고 내버려 둔 내 마음 귀퉁이도 함께 치유가 되는 중인 듯하다.
중증근무력증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한글로도 영어로도 너무 생소하여 발음하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나를 돌보아준 많은 수많은 간호사들도 이 병은 교과서에서만 보았지 이 병을 겪는 환자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고, 심지어 나의 증상을 모르는 의료진들이 많았어서 나는 내 병을 이해받지 못함에 슬플 때도 많았다. 흉선종도 중증근무력증도 두 가지 모두 극히 드문 난치희귀병이다. 나는 의료전문가는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들은 바로는 매년 중증근무력증이 발생하는 환자의 숫자가 10만 명 중 2명, 흉선종은 10만 명 중 0.2명 정도의 확률이라고 한다.
‘중증근무력증 위기’
중증근무력증의 그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근육의 무력함이 생명에 치명적일 정도로 중증이기에 중증+근무력증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특히 호흡근육이 멈추는 경우에는 손을 쓸 수도 없이 사망에 이르다 보니 과거에는 중증근무력증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다행히도, 현대의학에서는 약물로써 근무력증을 다스리고 일상생활이 가능하기에 중증이라는 단어가 굳이 더해지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중증근무력증의 정도가 가장 최악의 상태까지 진전되어 호흡이 멈추게 되는 '중증근무력증 위기(myasthenic crisis)' 상태를 굉장히 빠른 시간에 도달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중증근무력증 진단을 받았던 9월 26일 이미 중증근무력증 위기상태를 몇 차례 겪었는데, 이 병을 앓는 경우가 워낙 흔치 않다 보니 나를 담당한 의사 선생님들도 내 상황을 판단하고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응급실에서 만났던 알라딘을 닮은 신경과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약을 처방한뒤 차도가 있을 것이라 믿으며 사흘뒤 빠르게 나를 퇴원시켰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10월이 시작됨과 함께 중증근무력증 위기 증상이 무섭게 심각해져 갔다. 다음 병원진료일이 잡힐 때까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친척분들과 함께 사는 여동생이 나를 간호하느라 너무도 많은 고생을 했다.
중증근무력증의 다양한 증상들 중에 가장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은 역시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호흡곤란이었다. 몸은 눈에 띄게 약해져 가고 호흡곤란증세는 하루이틀이 지날수록 더 자주 발생했다. 호흡근이 약할 때의 나는 물에서 빠져나온 물고기처럼 약하게 얕은 숨을 쉬고 있었다. 하루는 낮에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갑작스럽게 호흡곤란이 왔는데 하필 그 찰나 내 옆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숨이 막히는 나는 목소리를 낼 수 없어 물건을 집어 들고서 벽을 마구 쳤고 그 소리를 듣고 이모가 달려오셔서 나를 도왔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불과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한순간이라도 보호자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은 나를 위해 서둘러 미국입국을 준비하고 계셨다. 밤이 되면 너무나 지치고 졸린와중에도 나는 숨을 쉬기 위해 잠들 수 없었기에 덩달아 여동생도 매일 곁에서 쪽잠을 자며 밤잠을 설쳐야 했다.
잊혀지지 않는 그날 밤
수차례의 호릅곤란중 10월 초 잊을 수 없는 밤이 있는데, 그날은 새벽 3시경 또 갑자기 호흡곤란을 겪었던 날이다. 의식은 멀쩡한데 숨이 쉬어지지 않으니 그 순간의 감정은 두려움을 넘어 슬픔이 뒤범벅이었다. 이제 나는 이러다 몇 분 뒤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구나 라는 공포감에, 나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내 두 눈에서는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나를 보는 여동생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이 상황은 지나갈 일이고 언니는 이 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너무도 차분하고 담담하게 나에게 말을 하는 내 동생을 보면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가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패닉상태였지만 동생의 말이 나를 붙들었다. 호흡을 조금씩 가다듬으며 안정을 찾았고 가냘픈 호흡을 되찾았다.
나와 여동생은 지금까지도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여동생은 늘 이렇게 고백한다, 자신의 입으로 말한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담담한 마음으로 그렇게 말할수 있었다고. 극한 상황에서 동생의 차분한 용기가 없었다면 나는 정말 지금의 삶을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상황에 대해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헤쳐나갈 단단한 용기를 가지게 된듯하다. 시간이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병을 이겨내겠다고, 이 시간도 지나갈 것이라고, 내 삶은 하늘만이 알고 계시겠지만 나는 나에게 올 시간들을 담담히 지나 보겠다고 생각했다.
병이 발병한 후, 나는 내게 휴식시간을 주려고 하늘이 이 병이 드러나게 하셨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거나 또는 바라보지 못한 삶의 많은 아름다움을 내가 찬찬히 느낄 수 있도록 나의 근육에 힘을 다 빼버린 건가도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여동생은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늘 모든 것을 빈틈없이 계획하고 스스로 애쓰는 언니가, 이제는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해지기 위해 그 많고 많은 질병 중 팔다리와 온몸의 근육에 힘이 빠지는 병이 온 것 같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연습할 수 있게 이런 시간이 온 것 같다고.
동생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해 10월 나는 비록 몸은 너무 아팠지만, 더 평온하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나의 삶을 살아내는 태도가 거듭날 수 있는 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나는 꼭 건강해진 모습으로, 다음 해의 10월을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보낼 수 있길 바랐다.
추석연휴에 무거운 이야기가 담긴 8화를 전하여
마음이 죄송스럽습니다.
모두 따뜻하고 풍성한 추석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