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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참 오랜 시간, 유학생

꿈을 위해 그저 뛰었던 시간

by Joyce 노현정
20대의 기록

나는 스무 살에 부푼 꿈을 안고 미국에 유학 왔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은 낯설고 어려운 것 투성이었지만 내손으로 하나하나 찾아내고 개척해야 하는 유학생활이 즐거웠고 보람 있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주어지는 작지만 귀한 기회들 속에서 내 마음을 뜨겁게 하는 꿈도 해를 더해갈수록 더욱 공고해져 갔다. 학부생활을 마친 후 나는 미국에서 계속 도전을 이어가고자 결심했다. 마음속에 파고든 어떤 '특정 계층'을 돕고 싶다는 꿈을 위해, 대학졸업 후부터는 미국 변호사가 되고자 그 목표에 집중했다. 그때의 나는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을 자주 뵈러 가지 않았다. 한국을 다녀오면 가족이 더욱 그립고, 유학생으로써 괜한 지출을 만드는 것이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목표달성 전까지는 최대한 한국에 덜 가겠다는 심으로 유학생활을 했다. 감사하게도 미국에는 나를 부모님처럼 돌보아주시는 친척들이 계셨고 그분들의 울타리는 유학생활 내내 내게 너무도 큰 힘이 되었다.


마음의 결심은 참으로 두둑하고 용감했지만 한인 1세대인 나에게 미국 로스쿨 입학은 꽤나 큰 도전이었다. LSAT이라는 로스쿨 입학관문을 통과하여 입학합격서를 손에 쥐고 부모님을 뵈러 한국을 갔는데, 몸 안에서 15cm가량 자란 양성종양이 발견되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아마 유학생활 4-5년 동안 자란 것 같은데 너무 크다고 하셨다. 한국에서 급히 개복수술을 한 후 나는 미국으로 부랴부랴 돌아왔지만,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던 나는 결국 로스쿨 진학을 미루고 한국에서 1년을 쉬었다. 1년 후 돌아온 미국에서 로스쿨 1학년의 삶은 듣던 소문과 같이 많이 힘들었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는 못해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24시간 늘 긴장하고 이 악물며 학교를 다녔던 듯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원하는 공부를 끝내고 싶었고 힘들어도 공부가 좋았다. 로스쿨 2학년과 3학년은 여전히 쉽지 않았지만 조금은 더 즐거웠다.




30대의 기록

한국나이로 30살이 넘어갈 즈음 로스쿨을 졸업했는데, 그 후 내 인생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가 참 어려웠다. 우선 미국 내 체류할 수 있는 합법 신분의 끝이 보이게 될까 상당한 불안감이 시작되었고, 영주권이 아직 없는 유학생 출신으로써 원하는 조건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캘리포니아의 변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애썼지만 시험을 보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선을 넘지 못하는 점수 때문에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바닥 깊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나이가 한 살 두 살 들어가는 만큼 나는 미국 영주권, 결혼, 변호사 시험이라는 3가지의 현실적인 목표들을 바랐지만, 무엇을 먼저, 어떻게, 어느새 이루어야 할지 몰라 불안해했다. 어느 하나 준비되지 않은 내 삶이 변화 없이 정체될 것만 같았던 때, 당시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순서대로 나에게 찾아와 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도를 했었다.


로스쿨 공부도, 변호사 자격증 도전도, 사실 넘어지고 좌절하는 내 모습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과 다름없다 싶었다. 최소한 타인의 눈에는 그리 보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나는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바위를 뚫는 낙숫물을 믿어보려 했다. 시간이 걸릴 문제이지만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저 나의 도전을 위해 물심양면 지지 해주시는 부모님-친지들-가족들을 떠올리면, 나이 많은 유학생으로 머물고 있는 내 모습이 죄송했다. 그래서 유학생으로써 미국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끝나면 한국으로 귀국하겠다고 담담하게 결심을 했던 때 - 갑자기 내 마음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얼마 후, 로또당첨과 다를 바 없을 만큼 얻기 어렵다는 H-1B 근로자 신분이 나에게 갑자기 주어졌다. H-1B 신분을 얻으면서 안전한 직장이 생겼고 생활을 할 수 있는 돈을 내 손으로 직접 벌기 시작하니 우선 마음의 숨통이 트였다.


말 그대로 모든 걸 다 내려놓겠다 생각한 순간 또 다른 문들이 열렸던 경험 - 내 삶에 허락된 큰 은혜들 중 하나임을 나는 뜨겁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렇게 하나씩 타지에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여건이 천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20대 내내 미루기만 했던 행복한 연애, 그리고 내가 번 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 먹는 기쁨을, 한국나이 33살의 나는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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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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