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병명이 뭘까
계속되는 도전
한국나이로 34살이 되던 해, 나와 남자친구는 그해의 11월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나는 다시 캘리포니아 변호사 시험에 도전했는데, 그동안의 결과 중 가장 높은 점수였고 도달해야 할 점수에 꽤 근접했지만 역시 합격의 패스는 아니었다.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불합격 소식을 확인할 때마다 바닥 깊은 곳으로 몸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깊은 실패와 좌절감과는 다른 마음으로 그때의 상황이 받아들여졌다.
여러 번 낙방의 시간 동안 나는 참 많이 괴로워했고 스스로를 미워했다. 나는 성실했는데 왜 이렇게 나에게 좌절과 장벽만 주냐며 이유 없이 세상도 원망했었다. 그런데 그해 2월에는 합격되지 못한 점수가 '실패'가 아니라 그저 과정의 일부라고 받아들여졌다. 아직은 내가 충분하지 않구나, 실망과 아픔보다는 스스로 부족한 점이 있구나 싶었다. 현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더니, 시험의 불합격을 확인한 후에도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도전의 여정이 결승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긍정적인 자세로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내면서, 그리고 하고 싶은 공부를 도전하면서, 약속된 날 결혼식을 올리고 앞으로 미국에 정착하면 되겠구나, 나는 생각했다. 나의 꿈으로 집요하게 바라온 직업의 모습을 아직 갖추지는 못했지만 회사일도 충분히 즐거웠고 배우자가 생기면 미국에서의 삶도 더 이상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그 어느 때보다 내 삶이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때라고 생각했는데 - 9월 - 나는 예고도 없이 너무나 갑자기, 서툴게 만들었던 청첩장을 감사한 분들께 전달하려 할 때쯤, 아파버렸다.
병의 발견
2019년 9월 어느 금요일밤 발견했던 무섭게 구겨졌던 혀 모양은 하루이틀 휴식을 취하는 사이 모양이 조금씩 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안일하게도 나는 그것이 호전의 사인이라 생각하고 월요일 출근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누군가 비웃는 마냥, 돌아온 월요일 아침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어지러운 두통이 시작되었다. 이틀뒤에는 어깨와 등의 근육통이 극심해졌는데 통증이 너무 커서 바로 앉아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 이틀뒤, 이번에는 그 아픔이 심장이 타들어갈 거 같은 통증으로 바뀌어, 숨을 쉬기가 너무 힘들고 가슴속이 타들어가듯 아파 나는 결국 주저앉아 울었다. 며칠 뒤 심장의 통증이 잦아들었을 때쯤, 이제는 속이 메스꺼워 음식을 못 먹겠더니 곧 말을 할 때마다 내 혀가 느릿느릿 내가 뜻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내 증상들을 듣고 도대체 병명이 무엇일까 함께 염려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뇌졸중인가 의심했고 누군가는 나에게 결혼을 앞두고 새 생명이 찾아온 것 아니냐며 웃으며 물어보셨다. 나의 아픔이 궁극적으로 좋은 일 때문이기를 바라셨던 마음이셨겠지만, 나는 사실일리 없는 그런 질문이 슬펐다. 아픈 동안 나는 참 미련하게도 극한 스트레스라고 믿으며 며칠을 쉬기만 했다. 아마도 당시의 나는 병원에 가서 무서운 병을 선고받는 것이 무서워서 그 순간을 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저 일시적인 통증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몸에서 나타나는 증세들이 일반적인 통증은 분명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통증이 계속 바뀌고 너무도 다양하니 도대체 어느 병원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나는 몰랐다.
미국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미국에서 병원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나는 스무 살부터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14년의 시간 동안 미국에서 병원을 찾지 않았던 나 스스로를 건강하다고 여겼었다. 양성종양을 그렇게 키우며 병을 만들었던 나 자신을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꾸준히 하는 운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건강히 먹는 식습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참 부끄럽게도 나는 정신적으로 긴장하며 나를 다스리면 건강 또한 지켜진다고 크게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건강보험을 갖기가 너무 비싼 미국땅이지만 마침 2019년 그해에는 H-1B 신분 소지자로써 좋은 혜택의 건강보험이 생겼었음에도, 혀가 구겨지고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온몸에 찾아왔을 때 나는 내 몸을 돌보기 보단 그저 참기만 했다.
그렇게 아프고서 열흘이 지났을 때쯤 - 함께 미국생활을 해온 여동생이 보다 못해 나를 미국의 병원 응급실로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