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인다고 해서 그 실체를 실체대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물질세계에서 사물의 존재여부도 그러하고 정신세계나 영적세계에서도 사유나 믿음의 경험여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의 일러스트는 오래전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다가 처음접했었다. 코비는 하버드 최고경영자 대학원에서 강의중실험에 사용되었던 위의일러스트를 인용해 세계를 보는 관점을 설명했었다.
무엇이 보이는가. 혹은 무엇을 볼 수 없는가.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멋진 깃털 달린 모자를 쓴 세련된 여성이 보이기도 하고, 커다란 매부리 코의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노파가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둘이 어렵지않게 보이기도 하겠고, 어쩌면 둘 다 보이지 않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이 실험목적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은 각기 다를 수 있다는 것이며, 서로 상이한 모습을 보았다 해서 틀리거나 논쟁할 일이 아닌 모두가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득한다.
코비는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다양성과 함께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실체와 함께 그것에 우리가 부여한 가치를 더한 것임을 상기시킨다.이를 이해할 수 있을때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수용할 수 있는 또다른 진실을 갖게되는것이다.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관점은 우리의 시각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대상을 어떻게 인지하고 해석하고, 궁극적으로 어떻게 이해하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들의 관점은 사물의 실체를 보는것과 그것에 부여된 가치를 보는것으로 분리될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다른 관점에서의 경험의 차이를 거의 의구심없이 받아들인다.
위의 일러스트로 이야기하는 것이 좀 더 단순 명료할 것 같다. 주름지고 아래 눈두덩이가 처진 슬프고 괴로와 하는듯한 한 노파가 보이는가.
180도거꾸로 다시 본다면, 생기발랄하게 웃고 있는 젊은 간호사가 보인다. 이 일러스트의 출처를 아직까지 찾지 못해서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정확치 않지만, 이 또한 우리 인식의 차이와 오류의 가능성을 말하고자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에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데 부정적인 것을 보지 말고 긍정적인 것을 보자는 등과 같은 설득은 진실과 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한동안 이 일러스트를 사용하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자고 교육, 교화를 위한 자료로 사용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지금 내가 위의 두 일러스트를 사용할 때는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 그것이 주어진 조건, 혹은 환경이라면, 달리 인식되는 모든 경험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솔직히 젊고 아름답고 멋지고 세련된 것이 긍정적인 가치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인간의 외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우리들의 사고, 바라보는 관점을 포함한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움의 가치는 노화되었다고 소멸된것은 아니다. 이미 누린 가치였고 세월지나 이제는 젊었을때 갖지못했던 지혜의 가치가 더해진다면 그 둘은 서로 상반된 가치기준이 아니라고 본다.
만약 가치를 전혀 부여하지 못하는 늙고 추하고 우아하지 못한 우리의 외모나 조건이나 환경, 바라보는 사고의 틀속에서이와 맞물린 우리들의 과거, 현실, 혹은 미래는우리에게고통과부인, 도피, 두려움, 강박, 거짓, 시기, 질투, 분노등을 경험하게 할것이 아닌가.지나친 비약일까.
창가에 있는 화초를 보자. 지금 개개인의 눈에 들어온 그 사물은 같은것을 보지만 서로 달리 보고있다. 사물의 실체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가치세계에서 받아들인다. 화초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잎사귀를 세며 바라보는 나의 태도와 행동과, 별관심이 없는데 아내의 관심이 있는 물체라 관심을 주고있는 남편의 태도와 행동사이에도 같은듯해도 다른 생각의 방식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다 주고 밑동만 남아있는 곳에서 늙고 지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은 그곳서 진정한 쉼을 얻고 자신이 그동안 받아왔던 모든 것들을 회상한다. 아낌없는 모든것을 받아왔음을 뒤늦게 깨닫고 진정한 풍요로움과 감사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그루터기 나무에 보이지 않았던 가치를 깨닭으며 자신과의 관계에서 존재론적 의미를 갖게 된다.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만 가능할까.
물질세계 속에서 완벽하게 길들여진 어른이 되어,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보고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순간에서 영원을 보고 있는가.그리고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봐야만 할 것을 찾아내고 영원을 갈망하면서 그와 어긋나지 않는 온전한 순간을 누리고 있는가.
답답한 시간을 한동안 보냈다. 그것은 먼저 나와의 소통이 필요해서였고, 나와의 관계에서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다. 한상우작가의 '앙리 베르그송 읽기'를읽고 있던 중, 브런치스토리 황진규의 철학흥신소를 통해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쉽게 설명, 정리해주신 글이흥미롭게도 내적으로 고민하던것들과 맞닿았다.
베르그손은보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것'을 본다 하였다. 그리고 자유한 만큼 보인다 했다. 내 안의 부자유는 자유를 향해 조금씩 다가선다. 이제 내 앞에 우유부단함에 맞서는'행동'이 요구된다.단순한 인식을 넘어서개인의 가치가부여된지각은 그에 따른 행동을 하기위한 것이다. 이제 인간다움은 지각, 사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그에 따르는 행동에 있다는 베르그손의 말에 적극동의한다.
그런 맥락에서 지각과 사유를 드러내는 글 또한 그에 따른 행동을 위한 것이지 사유자체를 위해서는 아닌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의 이 작은 글은 목발 두개에 의지해서라도 걸어야할 길을 목발하나만 들고 한발자욱도 내디디지못하는문자로만머물고만다.그래서 한동안 마음을 정리하느라 글을 쓰지 못하였다. 이제 먼지를 털고 일어나 조금 용감하게 행동해야할책임이 있음을스스로에게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