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음악을 소재로 글을 쓸 만큼 음악에 취미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비발디의 사계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이 많다. 고등학교 1학년, 만 16살 때부터이다. 듣고 또 듣고 한 것이. 우연히 그 시절이 생각나 브런치 글쓰기 제목에 '비발디의 사계'라고 적어놓고 이번주 글을 올리려던중이었다.
<사계> (Four Seasons)는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 1678-1741)가 1725년에 작곡한 합주협주곡이다. 그의 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으로 본래는 12곡으로 된 곡이었으나 4계절을 묘사한 첫 4곡이 자주 연주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곡으로 분리되어 현재의 <사계>가 되었다고 한다. 각 계절을 묘사하는 곡마다 3악장으로 되어있고 빠른 악장들 사이이에 느린 악장이 끼어있다. 비발디로 추정은 되지만 작자 미상의 짧은 시와 같은 소네트가 계절마다 붙어있어서 나 같은 사람이 곡의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며칠 전 직장에서 85세되신 어르신을 정기상담하던 중이었다. 부인께서 지병으로 6-7년동안 앓으시다 돌아가신 분이시다. 간병도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하셨다. 아내가 돌아가신후 2년정도 되었을때 우울증이 너무 심해지셔서 따님의 도움으로 센터생활을 시작하신지는1년 되셨다. 우울증 약은 여전히 복용중이시지만 다행스럽게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함께 식사도 하시고 웃으실 친구도 생기시면서 우울감이 많이 줄어들었고, 규칙적인 일상으로 하루하루를 잘 꾸려나가신다고 하신다. 그러나여전히 공허하고, 외롭고 그리움에 먹먹한 시간들이 찿아온다고말씀하신다.
"아버님, 사람들을 만나거나 분주히 어떤 일을 마치시고 댁에 들어가셔서 혼자 계실때, 그 빈시간에는 보통 무얼 하시나요"
"음식도 하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습니다."
"어떤 음악을 주로 들으세요?"
"다양하게 듣지만, 클래식 음악 듣기를좋아합니다" "클래식을 듣다보면 음악에 몰입되면서 이런저런 산만하고힘들었던 생각들이 사라지고 내적인 힘이 다시 생기곤합니다."
"그러세요? 특별히 좋아하시는 곡 있으세요?"
"비발디의 사계를 좋아합니다."
"정말요?" "저도 좋아해요! 그러잖아도 그 제목으로 글을 쓰려던 중이었어요"
어르신은 특히 <겨울>을 좋아하신다고, 따뜻해서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오랜 병환으로 나는 가난하고 방치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모르는 사람들은 3남 1녀인 나에게 외동딸로 귀여움 받으며 귀하게 자라났을 거라 말들을 한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들이다. 엄마는 아버지대신 밖에나가 갖은일을 해서 돈을 버셨고, 내 위의 어려서부터 일찍철든 두오빠들은 부모를 대신하며어린시절 없이 소년가장이 되어많은희생을 했다. 자매가 없는 가운데 나는 마음 둘 곳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변두리 동네 중학교 시절에는잠깐 친구들과의 어울림을 즐겼지만, 친구하나 없이 새롭게 시작한 서울 중심부에 있던 과거 명문고등학교생활은 쉽지않았다. 중학교때와 달리 수업을 쫓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학과과목에도 관심을 잃게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 음악선생님은 멋지게 생기신 남자선생님이셨다. 선생님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 반 친구들은 재잘거리며 음악시간을 기다렸다. 그때의 음악수업은 클래식 음악을 듣고 선생님께서 역사적인 배경과 음악해설을 해주시는 것이었다. 학과과목에 관심도 없는 터에 들어도 모르겠는 소네트, 악장, 그런 것에 대한 설명은 사실 지루했고 종치기만을 기다렸다. 그날은 비발디의 <사계>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각 부분을들려주셨다. 내 귀에는 그게 그것 같은것이... 시험볼 때 답을잘 찾아내야 하는데... 반복적으로 틀어주시며 설명해주시는 핵심을 모르겠다. 마치 참관수업에 형식상 앉아있는 객처럼 자리하나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그러다 선생님의 말이 점점 세밀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음악이 스토리로 들리듯이 말이다.
선생님께서 담임으로 계셨던 반에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친구와 어울리지도 못하는 어떤 여학생이 있었다 한다. 선생님도 가까이 다가서지를 못하고 신경을 못쓰고 있던 터에, 세종 문화회관에서 그 여학생을 만났다는 것이다. 어느 오케스트라인지 지금은 잊었지만, 당시 유명한 외국 오케스트라에서 비발디 <사계> 내한공연이 있었는데 티켓이 무척 비싸기도 했고 구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선생님도 아주 어렵게 구해서 지인과 함께 가셨는데, 그 여학생이 오랫동안 그 연주회를 위해 어렵게 돈을 모아 티켓을 사서 혼자 왔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그 여학생에게 관심이 가고 다르게 보였다고, 이제 시간이 흘러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멋있게 잘살고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우리들은 비발디 <사계> 어느 악장보다도 선생님 말씀에 집중했던것 같은데, 그중 내가 온 세포를 세워 들었으니 제일 열심히 들었을 것이다. 여학생에 대한 측은한 묘사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친구와 어울리지도 못하는..." 그렇게 해서 비발디의 <사계>가 16살 내 인생에 들어왔다.
당시 카세트테이프로 들었는데 늘어지고 끊어질 때까지, 그러다가 CD로 듣게 되면서 튀게 될 때까지, 카세트테이프나 CD를 몇 개를 샀었는지, 몇 개를 선물했었는지 헤아리지 못한다. 그렇게 비발디의 <사계>는 나의 음악이 되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사계는 내게 있어 지금껏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음악시험에서만이 아닌, 계절 간의 모호한 구간들은 언제나 있다. 봄날에서 생동감보다는 나른하고 지루한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고. 살만하면 폭풍처럼 찿아드는 갑작스런 불안도 심심하지않게 왔다. 맘껏 누리며 느긋해할 가을날과도 같은 기쁘면서도 평온한 날들도 물론 많았다. 어느새 끝날 것 같지 않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보낸 그 긴 겨울날도, 그러나 봄은 다시 온다는 그 아련한 기대도 있었다. 순차적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예측할 수 없도록 올 때가 더 많았다. 소네트가 봄이라 말하니 봄이지만 한겨울로 느끼던 시절도 있었고, 악장의 변화를 통해 여기저기 헤매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곤 하였다.
30대 후반에 온 미국유학, 결혼생활, 이민생활, 고전분투하면서 비발디의 사계를 잊었다. 정신없이 사느라 잊었나 했는데 외로움이 적당히 채워져서 잊었나 보다. 브런치글을 쓰다 보니 종종 잊었던 옛기억들이 떠오르곤 하는데, 불현듯 비발디의 <사계>가 생각나 제목으로 적어두고 서랍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어제 Youtube에 올라와 있는 <사계>를 친구에게 카톡으로 전하니, 갱년기에 아버지 병간호로 지쳐있던 친구가아주 오래간만에 음악을 들으며 단잠을 잤다고 연락이 왔다. 자신도 과거에 즐겨 들었다는 드보르작-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이 생각난다고 내게 보내주었다.
<사계>는 외로움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을 찾는 모든 외로운 자들을 만나준다. 가난한 집 16살 어린 여학생을 만나주고, 85세되신 아내를 잃고 그리움에 차있는 어르신도 만나준다. 고단한 갱년기 여인에게 단잠을 준다.
오늘은 비발디 <사계>의 어디쯤 되는 날일까. 봄. 여름. 가을. 겨울,1년 365일, 곧 우리들의 모든 삶을 다 이야기할 수 있다. 누구의 이야기든 또 어떤 이야기이든 다 노래할 만하고 연주할만하다. 작가미상이라 하지만 비발디로 추정되는 작가가 쓴 소네트가 있어서 우리는 그 음악을 그렇게 해석한다. 그리고노래가 되게 할 자신의 날들에 무명인 우리들은 작가무명의 소네트를 이렇게 쓴다. 지금 나 같은무명브런치작가말이다.
85세 어르신에게서 문학성과 예술성이 느껴져서 '브런치스토리'를 소개했다. 브런치를 통해 그리움이 슬픔을 지나 기쁨으로 맞닿아지게 될날을 보셨으면, 그분의 삶이 충분히 의미있고 멋지다는것을 보셨으면했다. 내가 제대로 보았다. 젊으셨을 때부터 시와 수필을 쓰셨다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쓰신다 하시며, 바로 전날 아내의 3년기일에 쓰신 시를 보여주셨다. 사진작가로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하셨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브런치에 새로운 작가 한 분이 오시게 될 듯하다. 우리모두의 <사계>어딘가에악장하나가 이렇게 추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