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ce shin Sep 20. 2024

어느 홈리스의 귀가

얼마전 밤10시정도의 늦은 강아지 산책길이었다. 주택단지 주위로 나 있는 낮은 언덕길을 걷다  멈춰섰다. 저쪽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  아래쪽 보행자길로 어디서 주웠는지 침대 매트리스 하나를 끌고오는 남자가 보였다. 홈리스가 없는 동네여서 그런모습을 보기는 흔치 않았지만 전형적인 홈리스의 모습이라 그러려니 하던게 걷던 길을 멈추게 된 까닭이 있었다.


남자는 어느새 언덕쪽으로 매트리스를 깔더니 기도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두손을 깍지끼고 두 무릎과 머리를 매트리스에 박고 엉덩이를  위로 들어올린채 꽤 오래도록 그러고 있었다. 그 시간에 다니는 사람도 없고 간혹 차들만 지나갈뿐 가로등빛만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누군가의 처절하게 거룩한 행위를 목격한듯 나는 위쪽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계속 서 있기에는 긴시간이 흘러 기도하는 그를 뒤로하고 걷다가 길을 건너 다시 뒤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는 지금 어떤 기도를 하고있을까. 강아지를 데리고 늦은밤의 동네길을 한바퀴 돌면서 여러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길에 다시 언덕위쪽에서 내려 보았을때는 이제 그는 누워서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저녁시간이라 그리 덥지않아서 참 다행이다 생각하며, 어느 홈리스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과 안스러움과 답답한 여러 생각과 감정이 올라왔다. 그날 그의 기도하는 모습이 사진처럼 내 머리속에 남았다.   



'어느 홈리스의 귀가'



홈리스가 돌아갈 집이 어디있다고 귀가란 말인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시 박물관 (Hermitage Museum)에 전시되어있는 렘브란트의 'Return of the Prodigal Son'  그림이 있다. 헨리 나우웬이 그 그림을 보고 깊은영감을 얻어 쓴 '탕자의 귀향'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날밤에 본 그의 기도모습에서 내 영혼이 오늘도 돌아갈 아버지 있는 집을 생각하게했다.  



어린시절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탕자이야기가 아닌, 첫째아들, 둘째아들, 그리고 주변인물들, 무엇보다 아버지 이야기에 주목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모두는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기도'라는 것은  내게도 익숙한 습관중의 하나이다. 오랜 시절을 그렇게 살아왔다. '신앙', '기도', '예배'주제나 신앙예식에 대해  그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내가 더 쉬지않고 행하고 그리고 떠들어 댓을법하다. 다시말해서, 나라는 인간이 노미널 크리스찬 (nominal Christian), 바리새인 (Pharisaee) 하나라는 것이다. 렘브란트 그림에서의 큰형처럼, 헨리 나우웬이 지적한 자기열심과 긍휼없는 자기의를 가지고 살며 아버지의 집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던 우리들처럼, 아니, 나처럼말이다.


그 상태에선 개망나니 처럼 살다 돌아온 동생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것은 누구라도 쉽지않을것이다. 평생 수고해도 받아보지못한 환대를 망나니 동생에게 베푼다고 생각이 드니, 모든걸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수 없었다. 그는 쓰라림과 분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날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귀가후 기도로 번잡스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남자는 이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홀로 되었는지, 혹여 갬블이나 마약으로 저리 되었는지, 이민사회에서 신분없고 직장잃고 월세 못내고 저리 되었는지, 알수도 없지만 안다해도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동네사람들로서는 외면하고픈 모습이긴하다.  


 나의 번잡스러웠던 생각은 눈에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만이 아니었다. 홈리스의 귀가와 함께 그의 하루를 마감하는 기도가 나의 발을 멈추게만 한 것만은 아닌, 아버지의 사랑에 온전히 거하지못하면서 잃어버린 동생을 긍휼히 여길수 없는 쓰라림에 분내하고 있을 나의 오늘은 아니었나해서였다.  


당신과 내영혼의 진정한 집, 우리가 돌아갈 고향,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만한 사랑하는 자들이 있는 그곳이 집이었는데,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 쉴 영혼의 집은 어디인가. 모든것을 잃고 빼앗기고, 혹은 스스로의 허물로 자신의 인생과 타인의 삶까지 불태웠다하더라도, 돌아가 내 허물을 내려놓고 아버지를 붙잡을 영혼의 고향집이 있는가. 오늘도 고된하루를 마감하고 그 안에서 온전한 쉼과 의탁을 할 수 있는가.


그 날 이후 종종 그가 머물던 곳을 바라보지만 그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아무쪼록 그의 육체의 삶과 영혼의 삶 또한 평온히 거할 처소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전 05화 거꾸로 읽어도 술술 읽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