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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 shin Aug 02. 2024

남편이 관음증입니다

 "조이스, 자기네 집 2층방에서 어떤 남자가 우리 딸 방을 계속 쳐다보고 있어요"
 
저녁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앞집에서 전화가 왔다. 불안하고 긴장된 목소리였다. 우리 집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강아지 말고 어떤 남자가 명 있긴 하다.  나와 강아지는 지금 1층에 있고 그 남자는 지금 2층에 있다. 전화를 주신 그분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어떤 남자'라 함은 강아지와 사람 둘사는 우리 집에서 사실 나의 남편이라는 것을.
 
한국사람이 드문 동네에 이사 오면서 앞집에 한국분이 사셔서 반가웠다. 남편과 사별하시고 대학원 다니는 둘째 딸과 함께 사시는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나를 친근하게 대해주셨고, 두 집 모두 강아지가 있어서 강아지 산책 중에 만나게 되면 길에 서서 강아지 얘기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지냈다. 서로의 집에 들러 거의 같은 외부구조인 타운홈인데도 내부인테리어에 따라 정말 달라 보이는 서로의 집을 구경하면서 살림살이 정보도 나누었다. 간호사로 일하시는 그분은 교대근무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나와 맞지 않아 서로 연락을 하며 집에서 가끔 커피 마시는 시간도 갖자고 전화번호도 나누었다.
 
 "그럴리가요? 무슨 착오가 있을 거예요. 기다려보세요. 제가 확인해 볼게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상대방은 분명 어렵게 전화한 건데... 잠시 창문가를 스쳐 지나간 남편을 보고 전화하진 않았을 텐데... 계단 7개를 급히 올라가는 내 발소리보다 가슴에서 나는 심장소리가 더 쿵쿵거리는 듯했다. 그 방은 컴퓨터방으로 남편이 자주 사용하여서 그의 옷가지들과 소지품들이 있다. 거리상으로는 충분히 떨어져 있지만 앞집 2층 딸방 창문과 우리 집 2층 컴퓨터방 창문이 마주 대하고 있다. 지금 남편이 그 방 창문가에 서 있다면 전화로 듣게 된 이 다급한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방문을 열면서까지 내 안의 불안감을 부인할 수 없었다. 불 꺼진 방에 이른 저녁 아직 남아있는 바깥 빛으로 비추어진 누군가가... 딱 남편 키 만하고 덩치도 엇비슷한 남자가 블라인드가 열려있는 창문 가까이 서 있었다. "에구머니나..." 남편이 외출해서 돌아와 겉옷을 걸어두는 목재 코트옷걸이였다. 일반 남자의 키만 한 높이의 옷걸이에 남편의 옷들로 적당한 몸통을 만들고 옷걸이 중앙 정수리에 모자까지 걸쳐 놓아서 영락없는 사람모양이었다. 앞집 한국 아저씨가 창문가에서 블라인드 사이로 오래도록 자신의 방을 주시하고 있다고 느꼈으니 젊은 아가씨가 기겁을 하고 엄마에게 이 상황을 급히 전달한 모양이다. 얼른 블라인드부터 닫고 옷걸이를 창문과 떨어진 방구석 한쪽으로 옮겨 놓았다. 희미한 바깥빛으로 만들어진 그 실루엣이 저녁시간 아가씨방을 엿보는 응큼스러운 아저씨 하나를 만들어 버렸으니 우습기도 했지만 일단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사실 안도의 숨을 쉬었다는 그 자체가 기분이 영 찝찝한 경험이었다. 안방문을 열었더니 진짜 남자 주인공은 침대에 덜렁 누워 스마트폰으로 야구를 보다가 저녁밥 먹으라는 말하려 올라온 줄 알고 해맑은 빛으로 쳐다본다. 옷걸이 때문에 일순간 관음증 환자 오해를 받았으니 이야기를 전하는 내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옷걸이를 창가 쪽에 두지 말자고 하며 솔직히 나도 컴퓨터 방문을 열기까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고 하니 가자미 눈으로 나를 흘겼다.
 
이웃집에 바로 전화를 해서 안심시키고 오해를 풀었지만, 젊은 여학생이 놀란 것 이상으로 잠시지만 그 가족에게 관음증 남편과 그의 아내였던것에 아찔했다.  이웃집에서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확인이라기보다는 신고전화이긴했다) 남편은 진짜 관음증 환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젊은 아가씨의 창문 블라인드는 한동안 닫칠테고 그동안 유리창문을 통해 교통 했던 나무들과 꽃들, 그 자연들과 계절들, 수영장에서 노는 해맑은 아이들의 노이지가 주었던 유쾌함도 차단될것이다. 이웃에 대한 안전감은 배반당했고, 정 붙이고 살던 동네가 싫어져 이사를 생각했을지 아니면 우리네가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떠도는 숫한 루머에 하나가 더 보태어져 지금껏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쉬쉬하며 목소리 낮춰 주고받는 이야기들 중 적지 않게 이런 식으로 생긴 오해나 잘못 전달된 루머일 때가 있다. 옷걸이의 실루엣이 만든 오류에 우리의 직접 간접적인 지나간 부정적 경험이 반사적으로 반응을 하고 또 다른 오류를 만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게 되고, 참외밭에서 신발끈을 고쳐 매지 말아야 하는데 하필 거기서 신발끈이 풀어졌으니 일단 매고 가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긴다. 인공지능으로 목소리까지 만들어 사칭하여 은행송금까지 하게 하는 세상, 쳇지피티 (ChatGPT)로 논문을 쓰고 그 놈들을 잡겠다고 또 다른 인공지능을 만든다고 하는 세상이다. 잠시 남편이 관음증 환자로 오해받은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다. 필요한 의구심이 지혜로운 것을 넘어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이끌곤 한다. 좋았던 관계도 내 뜻과 상관없이 영원할 수 없고,  물 흐르듯 만나고 까닭 모르고 헤어지게 되는 듯하다가 또다시 만나게도 된다.




소중한 인연인 누군가를 혹시라도 이렇게 오해하여 이제껏 풀지 못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남도 나를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나은 쪽이든 그 반대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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