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나 이 옷!
해가 뉘엿뉘엿한 석양의 해변도로를 달려 시골 고향집에 도착한다.
노모는 맨발로 뛰어나와 성공한 아들의 차를 주름진 손으로 어루만지며 감동한다.
좀 오래된 H사의 자동차 광고를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설명 하나 없이 자수성가한 아들의 이미지를 자동차 한 대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자동차가 성공의 표상이 되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자신에 대해 길게 설명하기보다 하나의 표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것을 가진다는 것이 멋져 보였다.
나는 옷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옷은 말투, 목소리, 눈빛, 걸음새 등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표식이 된다. 옷이 많아도 우리에게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입을 한 벌이 필요하다. 특별히 이쁘고 멋져 보이는 계절별 한 벌은 비장의 무기가 되어 준다. 입사 면접과 같은 한 번의 만남으로 나를 보여줘야 할 때 자신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고 자신감을 채워줄 옷은 갑옷처럼 든든할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남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고민 끝에 나오는 옷은 반려 옷이 된다.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소설 '자기 앞의 생'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14살 소년 모모와 늙은 창녀 로자 아줌마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생이 다해가는 것을 느끼자 치매에 걸린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옷장 깊이 넣어두었던 기모노를 입혀 달라고 한다. 이제 늙어 섬망이 깃든 육신이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기모노는 그녀의 젊은 날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던 시절에 입던 옷이다. 로자 아줌마는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기억하는데 필요한 딱 한 벌이었다. 기모노는 로자 아줌마의 반려 옷인 것이다.
반려: 나의 반짝이 되는 동무.
나를 나타내는 표상으로서의 옷을 가지면 그 옷은 반려 옷이 되다.
반려 옷을 가지러면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에 대한 고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딱 한벌 입을 수 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을 담아 입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을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마치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서 천국으로 가기 전에 인생에 소중한 기억을 고르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선택해야 한다.
간절히 소망했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입었던 옷,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 담긴 옷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거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담겨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서려 있고 지향하는 삶에 대한 가치가 드러난다.
그렇게 나의 정체성을 담은 옷 한 벌은 일상의 소모품이 아니라 인생의 오브제가 된다.
어떤 이는 이미 보풀이 잔뜩 인 자신의 반려 옷을 가지고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마음에 품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찬란한 순간을 기억해 줄 옷 한 벌을 마음에 그리며 산다. 반려 옷이 없다는 것은 내 인생의 찬란한 순간은 아직 오직 않았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서린 옷 한 벌을 마음에 품고 사는 일은 멋있지 않은가?
우리 인생의 찬란한 순간은 아직 도착 전이다. 지금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