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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 nina May 15. 2022

나를 올려둔 보이지 않는 평가대에서 내려올 것

세상에 나만 잘해서 되는 인간관계는 없다.

‘차도남’처럼 보이던 남편은 시골 출신이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아직 사랑의 열정이 활활 타오르던 어느 날 봄밤 어쩌다 남편의 시골집 입구에 가게 되었다. 차도를 벗어나니, 흙길 왼쪽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오른편에는 서너 채의 집이 듬성듬성 있었다. 어디가 밭이고 어디가 집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겨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파란 대문에 시골 개가 짖고 있다는 정도였다. 나중에 내가 그곳을 또 하나의 집으로 드나들게 될 줄은 그때는 진짜 몰랐다. 




봄에 만난 우리는 퇴근 후 데이트를 했다. 평일은 늘 양복차림인데 연분홍 와이셔츠와 파란 넥타이가 어울리는 남자였다. 여름휴가엔 미색 바지에 꽃무늬 셔츠를 멋지게 소화했다.

보통 옷의 힘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드러난다. 여름은 멋쟁이라 한들 셔츠에 바지 정도밖에 입을 수 없지만 가을 겨울이 되면 카디건에 스웨트에 분위기 있는 코트들이 옷의 멋을 드러낸다. 


어느 가을밤, 데이트를 위해 잠시 옷 갈아입고 나오겠다며 본가 시골집 앞에 나를 세워두고 들어간 '차도남'은 영락없는 촌부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랐다. 양복을 입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오래된 가을 버버리 코트 아래 드러난 유행 지나고 색 바랜 통 청바지, 거기에 운동화는 어쩜 그리 투박한지 도저히 내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니다. 함께 데이트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인물이지를 외치며 첫눈에 반한 이 남자가 본가 시골집을 보여줬을 때도 덤덤하던 나였는데, 옷차림에서 이질감을 느낀 순간 처음으로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남자와 결혼하고 나는 시댁만 가려고 하면 입을 옷이 없었다. 옷장 가득 걸려있는 옷들을 보며 한숨지었다. 시댁 어른들은 아무도 나에게 옷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낯선 시댁에 적응도 하기 전에 그 자리에 없는 여자들을 두고 인물 품평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참하다, 키가 크다. 인물이 못하다’ 등 내가 없으면 내게도 이루어질 평가가 이어지고 있었다. 미리 조심해야 했다. 


짧은 치마 안되고, 몸에 붙는 옷 안되고, 거추장스러운 장식 있는 옷 안되고, 흰색이나 드라이 소재는 시골집 부엌에서 조심스러워 제외이다. 결국, 그날 나를 놀라게 했던 남편의 옷차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이 되어서야 시댁을 향했다. 나를 벗어두고 시골 며느리를 입었다. 


명절이 지나면 가족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나누는 얘기가 인터넷에 넘쳐난다. 1년에 한두 번 보는 친지 가족들이 직장이나 결혼, 외모 등에 대해 물어오고 자기 마음대로 조언해 주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보다 어린 여성을 보면 인물 품평을 가차 없이 하는 나이 든 사람들이 있다. 이런 어른들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런 평가에 자유롭지 못한 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내가 느꼈던 이질감만큼 동화되려고 애썼다. 그들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며, 스스로 보이지 않는 평가대에 올라가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했다.  그들은 가만히 있는데 나만 나를 속여가며 내 옷이 아닌 옷들을 걸치고 나섰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남자 친구의 지인이나 가족들을 처음 만나게 될 때 여자들은 긴장한다.

한껏 꾸미고, 행동거지나 말투를 조심하고 그들이 뒤에서 나를 두고 내릴 평가에 신경 쓴다. 남자 친구를 사랑할수록 그렇다. 당연히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 긴장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만남은 나를 선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 알아가는 자리이다.

내가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에 속해있는지 나 역시 살펴보는 자리이다.

 

친한 동생이 시댁으로 인사 가는 첫날, 어떤 옷을 입을지 물어왔다. 그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좋아할까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나를 보여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서 입으라고 말했다. 좋은 인상을 심어 주려는 마음에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자신의 취향을 담은 옷을 입으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대신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애쓰는 순간, 스스로 약자가 되어 보이지 않는 유리 저울대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나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나는 재단되고 평가될 존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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