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의 가스 라이팅은 언제나 교묘하다
3000석 되는 콘서트장이 꽉 찼다.
가수 ‘거미’를 좋아하는 친구가 어렵게 구한 티켓으로 함께 콘서트에 다녀왔지만 팬이 되지는 않았다. 처음 그녀에게 호감은 느낀 것은 TV 토크쇼 프로그램에서였다. 예능 프로그램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태도로 남편 조정석 가족을 만났을 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시동생이 거미를 처음보고는 “실제로 보니 덜 무섭게 생겼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무섭게 생긴 얼굴’이라는 표현에 웃음이 났다. 그녀의 진중해 보이는 표정이 사실은 무섭게 생긴 탓이구나! 하다가 곧바로 그녀가 멋져 보였다.
연예인이 아니라 하더라고 무섭게 생겼다는 표현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닐 것이다. 예쁘다, 예쁘지 않다 하는 것과는 차원이 아닌 인상에 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미는 그 말을 할 때 과장하지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마치 ‘지금 밖에 비가 와요.’하고 전달하는 것처럼 꾸미거나 숨기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한 말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말에 영향받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거미를 좋아하는 친구는 원래는 대단한 멋쟁이였다.
친구와 길을 걸으면 날아오는 주변의 시선을 함께 감당해야 했다.
타고난 외모에 부잣집 외동딸답게 비싼 옷들로 우리 기를 죽여놓던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다. 결혼하고도 여전히 함께 어울리며 즐겁게 지냈는데 언제부터인가 한창 얘기를 나누다가도 9시만 되면 먼저 일어났다. 이유를 물어보니 경찰인 남편이 사건 현장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들려주며 나쁜 일은 밤에 생긴다고 일찍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처음엔 흘려들었는데 자꾸 듣다 보니 어쩐지 밤 외출이 꺼려진다는 거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우리는 그녀를 ‘통금 9시’라 부르며 모임에서 의자를 뺐다.
더 큰 변화는 그녀의 옷차림에서 나타났다.
하이힐에 몸매가 드러나는 니트 원피스를 입고 화려한 액세서리로 좌중을 휘어잡던 멋쟁이는 사라져 버리고 평범한 셔츠에 무난한 바지를 입고 다녔다. 쇼핑도 함께 다니며 아내의 옷까지 골라주는 다정한 남편 덕에 친구의 패션감은 녹이 슨 것 같았다.
“당신한테는 이게 어울려”
자신이 좋아했던 화려한 옷 대신 사랑하는 사람이 골라주는 수수한 옷을 입으며 어울린다고 말한다. 생각과 취향까지 남편에게 맡겨버린 친구는 점점 살이 찌더니 이제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가끔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 낯설다고 얘기하는 그녀는 더 이상 에너지 넘치던 예전의 멋쟁이가 아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이루어지는 세뇌가 사람을 어떻게 변하게 하는지 보여 주는 영화가 있다.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가스등’이라는 흑백영화이다. 남편이 일부러 어둡게 해 둔 가스등을 보고 아내가 어둡다고 하면 남편은 어둡지 않다고, 당신이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편을 사랑하던 아내는 그의 말을 믿고 자신의 현실 인지 감각을 의심하게 된다. 일이 반복될수록 점차 자신의 판단보다 남편의 말에 의존하게 된다.
‘가스 라이팅’이라는 용어는 패트릭 해밀턴 작가가 연출한 〈가스등 Gas Light〉(1938) 이란 연극에서 유래하여 영화 가스등(1944)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가스 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이다. 주로 가족이나 연인 등 친밀도가 높은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심리적 지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 당신이 원래 예민하잖아”
“ 너는 내가 잘 알아”
“ 당신은 좀 허술하잖아”
이런 말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내가 예민해서 그런가, 사소한 실수에도 허술해서 그런가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변화하는 존재이고, 완벽히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확신이 없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얘기에 영향받고 쉽게 마음이 흔들린다.
나만의 고유한 모습을 잊어버린 채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타인의 정의에 따라 사는 삶은 몇십 년을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그러니, 비록 사랑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나를 정의하도록 두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