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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마리

by 조병인

-너는 주인이 눈앞에서 맞아 죽는데도 구경만 하고 있었느냐?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무원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개동을 노려봤다.

-둘 다 비호처럼 날쌔서 덤벼들 틈이 없었습니다.

-틈이 없었던 게 아니라 무서워서 못 덤빈 것이 아니냐.

-발이 땅에 붙어서 안 떨어졌습니다.

무원은 뺨따귀를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무원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건을 ‘주상을 능멸한 범죄’로 규정했다.

첫째는 주상이 사는 도성에서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피살자가 주상의 명을 수행하는 관원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주상의 명을 받아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순관을 사칭했기 때문이다. 넷째는 주상의 직속관아인 의금부의 수사 역량을 깔봤기 때문이다.

무원은 나장 두 명을 왜관에 보내 간밤에 실제로 왜인들 간에 싸움이 있었는지 여부를 알아오게 하였다.

무원은 나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개동에게 수사에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물었다.

개동은 무원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자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대문에 와서 왜관 사령 행세를 한 자가 대문을 열지 않고 통사를 깨우라고 다그쳐서 몇 명이 왔었는지 모릅니다. 나리를 깨우라고 말한 자의 목소리는 약간 굵게 들렸습니다. 개천교에서 나리를 해친 자들은 귓속말로 속삭여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방이 캄캄해서 놈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무원은 개동에게 괴한들이 통사의 머리를 가격한 몽둥이의 행방을 물었다.

무원은 범행도구를 손에 넣어야 검시(檢屍)와 혐의 입증이 수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다행히 첫 번째로 중요한 숙제가 쉽게 풀렸다.

-몽둥이를 손에 들고 도망치던 자가 얼마 안 가서 몽둥이를 개울로 집어던졌습니다.

-몽둥이가 떨어진 곳을 기억하느냐?

-네, 정확히 기억합니다. 누가 치우지 않았으면 거기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요.

무원은 나장 두 명을 시켜서 개동을 데리고 즉시 개천교로 가서 몽둥이를 수거하게 하였다.

무원은 개동을 방에서 내보내고 고인의 아내인 박씨 부인과 아들 내외를 불렀다.

세 사람 모두 눈두덩이 퉁퉁 부어 있었다. 다행히 극도로 복받쳤던 감정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혹시 집히는 사람은 없소? 왠지 범인일 거 같다거나···.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영감은 쉰 살이 넘도록 누구와 원수를 진 적이 없습니다.

무원은 박씨 부인에게 남편이 왜관의 통역관이 되고 나서 작성한 일지(日誌)들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사건과 관련된 정보들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박씨 부인은 아들을 시켜서 다락에 보관된 남편의 일지 중에서 병오년(1426) 1월 이후에 작성된 일지들을 모두 가져오게 하였다.


아들이 일지를 가지러 안채로 들어간 사이 무원은 박씨 부인에게 수사 개시에 필요한 기본정보들을 물었다.
-이 집에서 같이 사는 식구가 몇이오.

-저와 큰아들 내외를 합해서 셋입니다. 딸이 하나 있는데 오 년 전에 출가해서 사위와 함께 순화방에서 삽니다. 지금 여기 와있습니다.

박씨 부인도 아들 내외도 누구와 척을 지고 살 사람들 같지가 않았다. 출가한 딸 내외도 양쪽 다 심성이 착해 보였다.


무원이 다음 질문을 생각하는데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간밤에 왜관에서 싸운 사람이 없었다고 하옵니다.

왜관에 보낸 나장이 돌아와 방 밖에서 보고하였다.

무원은 즉석에서 세 단어를 떠올렸다.

함정! 면식범! 하현달!


통사는 범인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서 죽은 것이다. 범인들은 통사의 직장과 출퇴근길을 정확하게 아는 자들이다. 범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달빛이 절반만 비치는 밤을 고른 것이다. 보름달은 너무 밝아서 숨기가 어렵고 그믐달은 너무 어두워 도주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명암이 반반인 날을 골라서 범행을 한 것이 틀림없다.


무원은 고인이 근무했던 왜관의 관원들을 만나볼 필요를 느꼈다.

-아버님의 일기장들을 가져왔습니다.

통사의 아들이 아비의 일지 다섯 권을 끌어안고 와서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일지들을 의금부로 가져가서 살펴보고 돌려주겠소. 일지를 보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나장을 보내겠소.

무원이 박씨 부인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범인을 꼭 잡아서 아버님의 혼령과 저희 가족의 원한을 풀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내일 오전에 검안(檢眼)을 할 것이니 오후에 와서 시신을 모셔가시오.

무원은 유족에게 다시 한번 애도의 뜻을 표하고 나장들과 함께 개천교로 향했다. 범인들이 현장에 떨어뜨린 물건이나 남긴 흔적들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

나장들과 함께 길을 의금부로 걸어오면서 무원은 수사의 난해성을 떠올렸다.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면 하나 이상의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깊이 파면 팔수록 새로 알게 되는 것보다 추가로 알아야 할 것이 많아진다. 이러한 난관을 창의(創意)로 극복하지 못하면 범인을 색출할 수 없다. 사건과 관련된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진범을 잡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 것이다.


개천교가 가까워가는데 태종 때 설치된 주자소(鑄字所) 건물이 보였다. 학문을 좋아하는 주상은 나라의 출판 역량을 키웠다. 활자를 개량하고(계미자→경자자) 희귀 서적을 대량으로 찍어서 전·현직 관리와 유생(儒生)들에게 나눠주게 하였다.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널리 보급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기 위함이었다.

무원은 주상의 원대한 포부를 떠받치는 동네에서 현직 외교관이 야밤에 괴한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된 것을 무척 뼈아프게 생각하였다. 호생지덕(好生之德)과 활인지심(活人之心)에 기초한 주상의 ‘어진정치’에 생채기가 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개천교에 도착하니 주위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있었다.

무원은 자기 일이 아니면 참혹한 죽음도 볼거리로 여기는 인심세태(人心世態)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수백 줄기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무원의 얼굴과 관복에 박혔다.

-의금부도사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원이 개천교에 올라서니 지독한 피비린내가 후각을 찔렀다.

송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돌바닥에 눌어붙어 역겨운 윤기를 반사했다.

무원은 나장을 시켜서 송장을 덮고 있는 돗자리를 거두게 하였다.

눈을 치켜뜨고 송장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송장 주위를 살폈다.

다리의 난간 앞에 깨진 사기조각을 닮은 작은 파편 세 개가 있었다. 모두 고인의 이빨 조각으로 보였다.

돌바닥의 핏자국과 부러진 치아들이 주인의 통분을 침묵으로 소리 질렀다. 황당하게 죽은 망자의 한 맺힌 증언이자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압박이었다.

-나는 여기 남아서 단서를 더 찾아볼 테니 송장을 의금부로 옮겨라.

나장 다섯 명이 수레에 송장을 싣고 현장을 떠났다.


무원은 고개를 쳐들어 눈에 안 보이는 흔적들을 더듬었다.

-개울에서 찾은 몽둥입니다요.

개동이 무원에게 긴 나무작대기를 내밀었다.

무원은 작대기를 받아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작대기의 한쪽이 뾰족하게 깎여있다.

끝부분에 묻어 있는 흙에 물기가 남아있다.

깎인 부분 아래쪽은 핏물로 얼룩져있다.

-괴한들이 이것으로 통사를 어떻게 공격하더냐.

개동은 개천교 위에서 괴한들이 나타나 순관 행세를 하다가 갑자기 야수로 돌변한 과정을 시간 순으로 보여주었다.

괴한이 몽둥이로 통사의 머리를 때리는 시늉이 실제상황 같았다.

땅에 엎어진 통사를 둘이서 발로 짓밟고 절명을 확인하는 동작도 연기 같지 않았다.

‘아무리 감쪽같이 범행을 하였어도 어떤 형태로든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 흔적을 빨리 찾는 것이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무원은 나장들에게 개울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수사의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게 하였다.

나장들은 해가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수색을 계속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허탕이었다.

무원은 몽둥이를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정신을 집중하고 이쪽저쪽을 번갈아가며 관찰했다.


머리에 두 가지 합리적 추론이 떠올랐다.

범인들은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자들일 것이다. 먼 곳에 사는 자들이 순관들 몰래 범행현장을 다녀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범인들은 범행도구를 이 근처 어딘가에서 구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을 알면서 성인 키보다 긴 작대기를 먼 곳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무원의 시선이 남산을 향했다.

산의 끝자락에 이십여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정겹게 뒤섞여 있다. 가옥들 사이사이에 마을의 터줏대감 같은 고목이 여러 그루 보였다.

무원은 시선을 멀리 뻗어서 마을 전체를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기와집들은 대부분 돌담이 둘러져있고 초가집들은 거의 전부 나무울타리가 쳐져있다.

무원은 작대기를 나장에게 넘기고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개천교와 인접한 초가집의 사립문에 빨간색 천과 흰색 천이 상하로 결합된 천왕기(天王旗)가 꼽혀 있다. 무속인의 집이라는 뜻이다.

무속신앙은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고려 때까지 국교였던 불교보다도 인기가 높았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미래가 불안할 때 무속인에게 점을 쳐달라거나 굿을 부탁하는 사람이 많았다. 농사철인데 오랫동안 비가 안 오면 나라에서 무당들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모두 귀신에 달린 것처럼 속이고 재물을 착취하는 자들이 많아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들은 무속과 무속인을 낮잡아봤다.

그런데 우연히 마주친 무당집의 나무울타리 아래 작대기가 뽑혀나간 구멍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구멍을 살펴보니 주변에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다.


무원은 작대기의 뾰족한 쪽을 구멍에 넣어보았다.

구멍과 작대기가 부신(符信)처럼 딱 들어맞았다. 위로 남은 높이도 옆의 막대기들과 같았다.

때마침 집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여인이 아들로 보이는 청년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무원은 두 사람의 용모에 시선을 박았다.

먼저 여인의 아래위를 빠르게 훑었다. 얼굴피부가 흰색에 가까울 정도로 뽀얗고 옷차림이 단정했다.

청년은 이마가 널찍하고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눈썹이 숯처럼 짙고 눈알이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겉보기에는 온순한 것 같아도 속은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여인과 청년은 무원의 날카로운 시선을 묵묵히 견뎠다.

-나는 의금부도사다. 여기 이렇게 꼽혀 있어야 할 물건이 개천교 옆 도랑에 버려져 있어서 주워왔다.

무원은 그다음 말을 하지 않고 청년의 눈을 주시했다.

-그것이 왜 거기에 있었지요?

청년은 대답 대신 반문으로 응수했다.

-내가 너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청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저는 그것이 없어진 줄도 몰랐습니다.

말씨는 두부처럼 연한데 눈빛은 바위도 부술 것 같았다.

무원은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청년의 눈빛에 살갗을 덴 기분이었다.


무원의 머리에서 ‘혹시’와 ‘설마’가 충돌을 일으켰다.

‘혹시 모르잖아. 설마 아니겠지. 혹시는 적극이고 설마는 소극이다. 혹시는 치밀이고 설마는 방심이다. 혹시가 설마보다 오지랖이 넓다.’

마음의 무게 중심이 스스로 알아서 ‘혹시’ 쪽으로 기울었다.


-간밤에 개천교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던 사실을 아느냐?

-사람들이 떠드는 말을 들었습니다. 범인이 잡혔습니까?


이 놈 봐라. 제 놈이 뭔데 수사에 관심을 보이지? 통사를 죽인 두 놈 중 한 놈인가? 즉시 포박해서 의금부로 데려다 신문을 진행할까? 아니야. 급하게 서두르면 일을 망칠 수 있으니 우선은 속을 떠보기만 하자.


-여기 이 핏물이 보이느냐? 범인은 여기서 이걸 뽑아가지고 개천교로 가서 왜통사의 머리를 내리쳤을 것이다. 혹시 집히는 사람이 없느냐?

무원은 핏자국이 선명한 부분을 청년의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아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청년의 대답은 당차고 야무졌다. 말하는 목소리에 당황하거나 동요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와 직업을 말해줄 수 있겠느냐.

-어머님 이름은 주련이고 직업은 무당입니다. 나이는 서른셋입니다.

저는 이 집의 장남이고 이름은 사재입니다. 나이는 열일곱 살이고 직업은 약초꾼입니다.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상이입니다. 나이는 열여섯 살이고 어머님의 굿을 도와드립니다. 아버지는 3년 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청년은 더 물어볼 말이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가족사항을 알려주었다.

-잘 알았다. 혹시라도 이 작대기를 뽑아간 사람을 봤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의금부로 달려와 내게 고하여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사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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