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복병

21. 단초

by 조병인

다음날 아침 무원은 예조로 출근해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아전에게 왜국과 교류를 이어온 기록들을 가져 다 달라고 하였다.


아전은 창고에 들어가 깔끔하게 편철된 문서들을 한 아름 꺼내왔다.

무원은 가장 최근의 기록부터 역순으로 열람에 들어갔다.


첫 번째 문서는 전년(기유년) 섣달 삼일에 주상의 명을 받아 통신사로 왜국을 다녀온 박서생의 복명서다. 왜국정부의 답서와 함께 왜국에서 견문하고 체험한 것들이 적혀 있다. 왜국의 실세가 선대의 뜻을 받들어 명나라를 섬기고 싶다는 뜻을 명나라에 전해달라고 부탁한 내용도 들어있다.


두 번째 문서는 전년(기유년) 유월에 왜국정부가 자국의 실세가 바뀐 사실을 알려준 서신이다.


세 번째 문서는 왜국의 실세가 죽어서 주상이 조문사절을 보낸 기록이다.


네 번째 문서는 왜국정부가 실세 역할을 대행하던 인물이 죽고 그의 동생이 새 실세로 추대된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다섯 번째 문서는 대마도 도주(島主)가 왜국 실세의 부고를 보낸 것이다.


여섯 번째 문서는 왜국의 실세가 주상에게 대장경의 판본을 달라고 요구한 글이다.

전년에 조선에서 보내준 《화엄경》의 판본은 필요 없으니 자기가 원하는 《대장경》의 판본을 달라고 적혀 있다. 주상이 읽어보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을 줄 수는 없다고 회신한 기록도 있다.


일곱 번째 문서를 펼치려는데 종루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도와주던 아전과 함께 예조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예조 아전이 무원에게 말을 걸었다.


-왜국은 사실상 조선의 속국이지요? 많은 수의 왜인이 많은 것을 조선에 기대서 살고 있으니까요. 혼자 혹은 여럿이서 바다를 건너와 귀화해서 살고 있는 왜인도 많고요.


-맞는 말이네. 지금의 주상은 말할 것도 없고 선대 임금들도 왜인들이 무엇을 요구하면 흔쾌히 들어줬지. 쌀이나 콩과 같은 먹거리에서부터 불경이나 범종 같은 불교유물에 이르기까지 안 가져간 것이 없지. 귀화한 왜인들은 농토와 집을 줘서 먹고살게 해 주고 혼자인 사내들은 조선 여인과 혼인까지 시켜줬고. 그런데도 왜국에서 건너오는 사신이나 상인들이 우리 정부를 대하는 태도가 오만하고 불손하기 짝이 없으니 통탄할 일 아닌가. 자기들의 청을 거절하면 안하무인으로 행패를 부리고. 바닷가 고을들은 사시사철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리니 주상은 얼마나 골치가 아프시겠나.


-바쁘신 분께 제가 공연한 것을 여쭤서 귀한 시간을 허비하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식사 후의 짧은 한담보다 좋은 소화제가 어디 또 있겠는가. 자. 이제 다시 일터로 가세.


***

일곱 번째 문서는 왜국의 실세가 우리 주상에게 대장경의 판본을 요청한 글이다. 백가지 진귀한 예물도 필요 없고 오직 대장경 판본만 갖고 싶다고 적혀 있다.


여덟 번째 문서는 왜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밀교대장경과 주화엄경의 판본에 더하여, 금자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 1부, 금자 《아미타경》 1부, 금자 《석가보》 1부, 푸른 종이에 금자로 쓴 단본 《화엄경》 1부, 《대장경》 1부, 초록비단으로 장식한 대홍라 가사 한 벌, 검푸른 비단으로 장식한 자라괘자 한 벌, 남라장삼 한 벌 등을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이다. 왜국에서 송환을 요구한 왜인 53명도 딸려서 보냈다고 적혀 있다.


아홉 번째 문서는 우리 정부의 사절단이 푸짐한 예물을 가지고 왜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우리 정부와 왜국사절단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그 안에 왜통사 이춘발이 가하(加賀)라는 왜국 승려와 함께 의금부에서 대질신문을 받고 매질까지 당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춘발은 생전에 강직하고 청렴한 관원이 아니었나? 그런 사람이 무슨 이유로 의금부에 잡혀가서 매질을 당했을까?


무원은 전년 유월에 수립된 「밀무역 근절대책」의 절반이 ‘왜관의 통사·사령·방지기·창고지기 등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라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혹시 이춘발이 밀무역을 중개하거나 눈감아주다 적발된 것일까?


무원은 예조 아전에게 이춘발의 이름이 나오는 기록이 또 있으면 가져다 달라고 하였다.


아전은 곧바로 창고에 들어가 먼지가 수북한 문서들을 꺼내다 날짜순으로 늘어놓았다.

무원은 아전이 가져다준 문서들을 날짜가 빠른 것부터 차례로 읽어나갔다.


첫 번째 문서는 계묘년(1423) 11월 23일 왜국의 실세가 사신을 보내 대장경판을 청한 글이다. 조선에 장경판이 여러 개라고 들었으니 하나만 달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주상은 처음에 대장경 판본을 무용지물로 여기고 전부 주려고 하였다. 대신들은 경판을 아낄 필요는 없지만 요구대로 들어주다 보면 뒤에는 줄 수 없는 것을 청구할 것이라며 극구 말렸다.


주상은 생각을 바꿔서 대장경판은 단 하나뿐이어서 줄 수가 없으니 밀교대장경과 주화엄경의 판본과 한자대장경을 주겠다고 하였다.


왜국사절단의 단장 규주와 부단장 범령이 대장경 판본을 안 주면 자기네 실세가 재차 요청할 거라며 주상에게 재고를 청했다.


주상이 좋은 말로 알아듣게 타이르니 ‘왜관에 돌아가 깊이 생각해 보고 다시 아뢰겠다.’라고 하고 순순히 물러갔다.


이틀 뒤에 규주와 범령이 푸짐한 예물과 협조를 요청하는 글을 예조에 올렸다. 사신들은 만약 빈손으로 돌아가면 자기들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주상을 설득하여 대장경 판본을 꼭 가져가게 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나흘 뒤에 새해 첫날을 맞아 주상이 경복궁 근정전 뜰에서 대신들과 더불어 망궐례를 행했다.


규주와 범령이 함께 입국한 왜국상인 138명 가운데 60여 명을 데리고 와서 주상에게 하례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주상이 답례로 후하게 물품을 내렸다.


규주와 범령이 지신사(도승지) 곽존중에게 글을 올려, 주상을 설득해서 자기들이 대장경판 7천 권을 꼭 가져갈 수 있게 해 주기를 간곡히 청했다.


주상이 모두 물리치자 규주와 범령이 그다음 날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왜국을 떠날 때 자기네 실세에게 조선에서 대장경판을 주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고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면 실세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며 먹기를 거부했다.


주상이 두 사람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고 몇 차례 사람을 보내 단식을 멈추라고 설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음식을 먹지 않자 왜국에 사신으로 갔었던 관원들을 보내 사신의 품격을 지키라고 꾸짖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단식을 멈추니 주상이 그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밀교대장경과 주화엄경의 판본에 더하여 목판으로 인쇄한 대장경과 금자로 쓴 《화엄경》을 주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자기네 실세가 금자로 쓴 《화엄경》을 좋아할 것이라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주상은 105 바리나 되는 경판을 남해의 포구까지 실어다 주기 위해 경유지 인근 고을의 소와 말들을 징발하게 하였다.


그다음 날 왜국사절단을 따라온 가하라는 승려가 왜통사 이춘발에게 서찰을 주면서 예조에 올려주기를 청했다.


가하가 말하기를 ‘규주가 왜국정부에 보내려고 써놓은 서찰을 베낀 것’이라고 하여 춘발이 받아서 예조 정랑인 정재에게 주었다.


조선에 와서 힘써 대장경판을 청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으니, 병선 수천 척을 보내서 강제로 뺏앗아가면 어떻겠습니까.

서찰을 읽어본 예조 판서 신상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보다 앞서 왜구들에게 붙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온 백성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백성은 왜국의 실세가 대마도 도주에게 「조선에 사신을 보내 대장경 판본을 청하려 하는데 만약 안 주면 쳐들어갈 생각이니 너희들도 전함을 수리해 두라.」라고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주상은 의정부와 육조의 대신들을 긴급히 소집했다.

예정에 없던 회의라서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부랴부랴 편전에 모였다.

대신들이 모두 도착하자 주상이 굳은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가하라는 왜승이 춘발에게 주었다는 서찰은 전에 왜구에게 붙잡혀갔다가 돌아온 자의 말과 차이가 없을뿐더러 왜국의 실세가 보내온 글에 ‘요구를 들어주면 영구히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구절이 들어있다. 이 세 가지 말을 맞춰보면 저들이 극악한 짓을 벌이려고 한 것이 분명하지만, 저들은 대장경판을 얻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위해 그런 궁리를 하였을 것이다. 또, 우리가 화엄경과 밀교대장경의 판본에 더해 금자로 쓴 화엄경 등을 주기로 약속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니 그냥 넘어가면 어떻겠는가?


회의에 참석한 신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옆 사람의 얼굴을 쳐다봤다.

바로 그때 왜관의 녹사(錄事)가 헐레벌떡 달려와 ‘규주와 범령이 가하가 예조에 서찰을 올린 것을 알고 가하를 꽁꽁 묶어서 왜관에 가뒀다.’고 아뢰었다.


의금부에 누설자 색출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조사 결과 예조 정랑 정재가 이춘발이 올린 서찰을 왜통사 윤인보에게 보여줘서 인보가 그 내용을 규주에게 알려준 것으로 밝혀졌다.


사태를 파악한 왜관의 감호관 이승이 규주에게 가하를 결박한 연유를 물었다.

규주는 가하가 여러 차례 절도를 저질러서 신문을 할 거라고 하였다.


이틀 뒤에 규주가 글을 적어와 가하를 신문한 결과라며 예조에 올려주기를 청했다.

이승이 펼쳐보니 가하의 절도혐의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없고 가하가 헛말을 지어내 이춘발에게 주었다는 내용만 있었다.


이승이 말과 글이 다른 이유와 본국에 그런 서찰을 보내자고 말한 사람을 물었다.

규주는 수행원 10여 명과 함께 예조로 달려가 가하와 이춘발의 요망하고 용렬한 처신을 성토하는 긴 글을 올렸다.

절도혐의로 궁지에 몰린 가하가 이춘발의 꼬임에 속아서 서찰을 위조한 것이니 저희들을 의심하지 마소서. 못 믿겠으면 저희들을 붙잡아두고 왜국에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소서.


주상은 영의정 유정현·의정부 참찬 안순·병조 판서 조말생·대사헌 하연·형조 판서 권진·동부대언 정흠지·우사간 박관 등을 위관으로 임명하여 춘발과 가하를 대질시키게 하였다.


어명을 접수한 무원은 창고에 보관된 형구(刑具)들을 모조리 꺼내다 낭청 마당 사방에 벌여놓게 하였다.

의정부와 육조의 고관들이 당상에 벌려 앉아 근엄한 시선으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가하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고대를 아래로 떨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위관들은 가하를 달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면서 자백을 압박했다.


가하는 춘발이 원해서 자기가 써준 것이고 구주와 범령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춘발은 가하에게 서찰 위조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신장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대질결과를 보고받은 주상은 사신이 절도혐의를 덮어주는 조건으로 가하를 회유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외국사신을 법대로 처리할 수는 없다며 가하를 용서하고 규주와 범령의 흉계도 캐묻지 않았다.


무원은 도를 넘은 왜국사신들의 무례를 주상이 너그럽게 넘긴 이유가 궁금했다.

무원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춘발이 왜관의 통역관이 되기 이전의 일지들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앞서 이춘발 피살사건을 수사할 때 춘발이 왜관의 통역관이 된 이후의 일지들만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의금부로 출근한 무원은 나장 덕수를 춘발의 집에 보내 왜국사절단이 다녀간 갑진년(1424) 1월과 2월에 작성된 춘발의 일지들을 빌려오게 하였다.


1월 첫날의 일지부터 꼼꼼히 읽어보았다.


○ 갑진년(1424) 1월 22일


사필귀정이다. 30년 가까이 관직에 있으면서 사익을 위해 행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재물과 요직을 미끼로 거래를 제안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를 믿고 중책을 맡기신 주상을 배신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가하의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받았다. 가하가 윗사람들에게 약점을 잡혀서 바른말하지 못한 것 같다.

왜국 사신이 자신의 흉계를 영구히 감추기 위해 나를 죽일까 봐 신경이 쓰인다. 직접 죽이기 어려우면 탐나는 미끼로 누군가를 매수하려 할 것이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왜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기질이 있다. 낮에 매질을 당한 자리가 몹시 아프다. 내일 아침에 제시간에 출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갑진년(1424) 2월 7일

왜국에서 온 사신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 규주와 범령을 포함한 왜인 5백23명이 입국할 때 타고 온 배 16척에 나누어 타고 갔다. 규주가 방환을 요청한 왜인 53명도 그중에 포함돼 있다.

판선공감사 박안신과 대호군 이예가 각각 회례사와 부사로 따라갔다. 왜국의 실세에게 예물로 보내는 밀교대장경과 주화엄경의 판본을 비롯하여 엄청난 양의 물품을 가지고 갔다.

예물목록에 금자로 쓴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아미타경》·《석가보》 각 1부, 푸른색 종이에 금자로 쓴 《화엄경》과《대장경》 각 1부, 초록색 비단으로 지은 대홍라 가사 한 벌, 검푸른 비단으로 지은 자라괘자에 한 벌, 남색 비단으로 지은 장삼 한 벌, 흑세마포 15 필, 홍세저포 15 필, 백세저포 15 필, 돗자리 35장, 잣 5백 근, 인삼 1백 근, 꿀 20말, 표범가죽 5장, 호랑이가죽 5장, 각색 가죽 10장, 검붉은 가죽으로 만든 미투리 한 켤레 등이 들어있었다.


무원은 춘발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규주와 범령이 귀화한 왜인에게 이춘발을 죽이라고 시키는 상황을 그려봤다.


이춘발이 죽은 뒤에 의금부에 나타나 홍성부를 용의자로 제보한 기무라가 떠올랐다. 그의 제보를 수상쩍게 여기고도 시간에 쫓겨서 색안경을 벗은 기억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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