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가 이렇게 즐거운 활동이었다니!
작성일 : 2018.8.18
여기는 동남아의 한 국가.
여기 온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동안 조금 덥거나, 많이 덥거나 잠깐 선선하다가 덥거나가 계속되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식당과 게스트하우스를 같이 운영하고 있는데, 아니지, 내가 운영을 하는게 아니라 부모님이 운영하시는데 잠깐 도우러 왔다가 발목이 잡혀(그 이유는 나중에 밝히도록 하겠다) 언제까지일지 모를 일정과 계획 속에 터를 잡게 되었다.
며칠 전, 한국에서 스무명 정도 되는 대학생들이 와서 숙식을 하고 있다. 덕분에 안그래도 매일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더해져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여기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정리해도 책 몇권이 나올 것 같다.ㅎ
자, 지금부터 오늘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된다.
스무명의 손님이 온 후, 내 중요한 일과는 빨래다.
평소에는 직원들이 세탁기에 내 빨래를 해 왔기에 내가 하는 빨래란, 세탁할 옷을 방 앞 세탁바구니에 넣어놓고 옷이 오면 꺼내서 옷장에 보관하는 일이었다. 속옷이나 망가지기 쉬운 옷은 내가 손빨래를 했으나 귀찮아서 몰아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약 스물 다섯명(다른 하숙생 포함)의 빨래를 성별로, 방별로, 빨래망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우리집 빨래망을 사용해)을 구분해서 세탁기를 돌리고 널고 개서 원위치로 보내는 일이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많이 수월해졌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현지 직원과 함께 이 일이 수월해지기까지 비가 와서 직원이 빨래를 옮겨놓으면서 섞인 일이 두 번이 있고 여러번의 컴플레인(빨래가 안왔거나 섞였거나 등등)이 있었다. 짜증과 분노, 스트레스를 거쳐서 빨래를 모아 사진을 찍어두고, 방별로 빨래를 널어놓는 구역을 나누고, 옷걸이를 널어놓는 방향을 정하는 지혜가 출산되었다.
저녁에 손님이 들어와서는 각자 빨래를 확인하고 '빨래망이 하나가 안왔어요.', '초록색 수건이 없네요.', '검정 빨래랑 같이 빨아서 흰 티가 뭐가 묻었는데 빨래비누 좀 주세요.' 등등 이야기를 쏟아낸다. 이것으로 끝이면 좋으련만, 숙소에 대한 건의사항을 포함하면 배가 된다.
이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어느덧 빨래하는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록 즐거운 시간이 되어버렸다. 평소에 귀찮게 여겨진 빨래가 갑자기 왜 즐거워졌을까 생각해보니 몇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첫째는 빨래가 세탁기에 들어가기까지 세심한 작업 과정이 따른다. 처음 며칠은 골머리를 쓰느라 피곤하던 절차였다. 먼저 세탁기에 물을 받고 빨래를 헌팅하러 간다. 각 방마다 0~10뭉치의 빨래를 나름의 기준에 따라 빨래망에 넣어 사진을 찍고(이렇게 까지 해야하나 할 정도로 세심함을 넘은 집요함이 문제를 직방에 해결해 줄 줄이야) 세탁기에 넣는다. 이때 세탁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내 동작은 빨라진다. 중간에 내려가 세제를 넣고 회전을 시킨 후 다시 올라가서 빨래를 파악해서 가져온다. 세제가 잘 섞인 물 속에 빨래망을 퐁당 퐁당 빠뜨린다. 이 기분은 뭐랄까.. 잘 달궈진 기름 속에 섬세하게 준비된 튀김옷을 입고 잠수하는 예비튀김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둘째는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일하는 시간인 오전 11시까지의 시간이 길어지고 많은 생산물이 생기면서 내 삶의 패턴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매일 4~6차례 빨래를 돌리기 위해 오전은 온종일 세탁기 스케줄에 타이머가 고정되어 있다. 방에 누워있다가(항상 피곤하다..) 시계를 보고 일어나서 세탁기까지 계단, 복도, 주방, 복도, 세탁실을 거쳐 갔다가 빨래를 3층에 널고(계단이 매우 가파르다) 내려와서 다시 빨래를 돌린다.(중간과정 생략) 빨래를 널을 때 내 마음은 물이 가득찰 세탁기 때문에 손이 빨라진다. 물리적인 재촉이 횟수를 반복하면서 내 게으름에 시동을 걸어주었고 이것은 정체불명의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처음 며칠은 신경을 쓰며 오르락 내리락 왔다갔다 하는 것이 피곤 그 자체였으나 어마어마한 빨래를 목욕시켜 토해내는 세탁기를 볼 때, 마치 갓 순산한 여인를 보는 것처럼 숙연한 마음까지 들었다. 게으름을 반성하며 어느새 내 몸이 부지런함을 열망하며 깨어나고 있었다.
출처 pixabay
세번째는 햇볕이 주는 신비한 힘이다.
아무래도 빨래의 하이라이트는 바싹 마른 빨래가 아닐까. 한국에서 빨래가 즐겁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실내에서 빨래를 말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는 옥상에 빨래를 널어서 직광에 빨래가 마른다. 빨래를 널고 있노라면 숨이 헐떡거릴 정도록 후끈함이 올라와 내 영혼까지도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우기인 지금, 빨래가 마치 달궈진 숯불에 올려진 삼겹살처럼 지지직~ 짜라락~ 스시식~ 향내를 내며 마르는 것 같아 절로 흥이 난다. 내 살 속을 파고드는 햇볕이 내 영혼까지도 항균해주고 소독해주는 것 같아 빨래와 함께 나도 세탁되는 것 같다.
이렇게 바싹 마른 빨래는 자기 주인 빨래망에 입실해 각 방 앞으로 배달이 된다. 목욕재기를 하느라 긴 하루를 보내고 제자리에 도착한 빨래. 그 주인은 이 기쁨을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