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일상
작성일 2023.3.7.
한 2-3주 동안 정신없는 일들이 있었다.
2월 중순에 한 슈퍼체인(가장 납품량이 많은)의 계약 방식이 바뀌면서 내부적인 문제가 너무 많고 매일 말이 다르고 직원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통에 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명과 대화를 하고 우리 직원이 며칠을 가서 몇시간을 기다려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잦았다. 전에는 주문이 없이 우리가 알아서 배달을 했지만 이제는 주문이 들어오면 배달을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요구와 시스템에 맞추기 위해 우리는 비상체계를 가동해서 80개가 되는 지점을 4팀으로 나누어 하루에 돌기를 몇번을 했다. 그동안 매일 일정량으로 나가던 스케줄이 갑자기 균형을 잃자 내 마음의 평안도 균형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하루에 80개의 지점에서 주문을 보내 놓고서는 하루, 또는 이틀 안에 배달을 다 하라는 것이다. 계속 본사와 이야기 하면서 주문을 일주일에 2번 넣어달라, 그게 안되면 배달 기간을 늘여달라 등등을 이야기 하면서 아주 조금씩 개선을 해 가고 있다.
이 엄청난 부조리(언급하지 않은 수없는 부당함이 있었다)와의 싸움을 하며 너무 지쳐갔지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할 힘을 얻을수 있었던 것은, 직원들이 한 마음이 되어 애써준 것이고 그 중에 2월에 새로 들어온 회계 직원이 너무도 일을 야무지고 충실하게 해 주었다.
그동안 행정 직원 1명을 데리고 회계며 행정, 직원교육, 인사, 총무 등 전반적인 일을 다 했고 행정 직원은 매일 수없이 실수를 반복하며 내 인내심의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회계 직원이 와서 그동안 행정 직원이 틀린 서류, 오류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바로 잡았고 우리 회사가 회계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앞으로 우리가 이런 문제 없이 꼼꼼히 정확히 해야함을 정비해 주었다.
이 회계 직원을 뽑기 위해 여러명 면접을 보았고 행정 직원과 끊임없이 논의를 했다. 결국 적임자를 뽑고 지금의 회계 직원을 혹시 몰라 대타로 염두해 두고 지속해서 연락을 했었는데 적임자가 시작전에 그만두면서 대타였던 이 직원이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와서 보니 이 직원은 대타가 아니라 최선이었다니, 인생이란 알수 없고 사람이란 보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를 깨닫는다.
어쨌든, 복덩이로 굴러들어온 이 직원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아무 전문적인 지식없이 얼마나 주먹구구로 했는지를 알게 되면서 정말 여기까지 큰 탈없이 온 것이 기적이구나, 지금이 우리가 제대로 해야할 절호의 타이밍이구나를 깨달았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 갑자기 예기치 않은 기회가 왔다. 라면을 유통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한국 본사 직원과 미팅을 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우리 회사는 후보에 생각도 하지 않고 왔다고 하더라. 길지 않은 시간동안 이 나라에서의 유통, 시장, 라면의 이름과 디자인, 라면 유통의 특성, 우리 회사가 어떻게 사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그분이 감동을 받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본사에 잘 이야기를 하겠다고 가셨다. 그리고 며칠 뒤 너무 기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문자를 했는데 내가 확인을 안해서 바로 전화를 했다면서 본사에서 좋게 보셨고 다음 주에 옆나라에서 근무하시는 팀장님 두분이 오셔서 미팅을 할 거라고 하셨다. 그동안 맨 땅에 헤딩하면서 매일 전쟁을 치르고, 주말마다 혼자 한복을 입고 마트에 가서 시식을 하며, 말귀를 못알아듣는 직원들과 매일 거품을 물고 씨름하며 교육시켰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비행기로 샘플을 잔뜩 가지고 4:1 미팅이 시작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마주 대하니 예전에 한국에서 조직 생활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50~60대 중견 간부, 임원분들이었는데,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스쳐 지나가기도 어려운 분들이다. 그런데 순간 너무 숨이 막히고 그분들도 참 어색해 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어린 여자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아리송한 표정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고생하며 온 몸으로 배웠던 노하우와 지식, 기술을 가득 충전하고 당당히 임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디자인, 마케팅, 유통 등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가 오갔고,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오, 디자인 전공하셨어요?"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디자인에 대해 니가 뭘 좀 알아? 이런 뉘앙스였던 것 같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아니요, 이런 일을 하다보니까.."하면서 색깔과 구도, 그림, 글씨, 구성 등에 대해 나도 모르게 줄줄이 나왔고 그림이 잘못 되어있는게 보여서 이야기 했더니 당황하시며 한숨을 쉬면서 해외에 있다보니 저희가 부족한게 많다며 갑자기 자아 비판, 반성 모드로 바뀌는 것이다. 미팅 초반의 분위기가 반전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몇가지 조건들을 이야기 하고 잠정적으로 계약이 성사되는 것처럼 마무리를 짓고 헤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단톡방에서 제품의 신대륙 착륙을 어떻게 시킬지 열정적이고 건설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그 시점에,
라면을 하게 되면 사용할 우리의 다른 이름의 회사를 담당하던 회계사무소에 내부적인 문제가 생겨서 이 회사를 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가 뻥뻥 터지게 되었고 나는 이것을 수습할 방법을 찾기 위해 정보를 얻고 고심을 하며 어떤 순서로, 어떤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머리를 싸매며 듣보잡의 회계법 관련 내용을 대하며 그동안 1차로 몰려왔던 쓰나미를 온 몸으로 막아서고 있다가 2차로 쓰나미를 맞으며 서서히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알고 지냈던, 예전에 우리 회사에 와서 일을 할 뻔했던 훌륭한 직원과의 만남이 있었고 그 직원은 라면을 시작하면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모든 것이 착착 진행이 되어가는 듯 보였다.
순이익 계산을 하는데, 프로모션이며 시식행사며 정식 세금신고며 등등 빼보니 이익이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다시 미팅을 하면서 2시간에 걸쳐 이익 계산을 설명하고 논의하고 확인했다. 결국 내 계산이 약간의 오차가 있었으나 큰 차이는 없었고 그분들은 1차적으로 큰 금액이 남는 것(순수익은 관심없으심)만 보신 것 같다. 그 날, 기존 우리 회사를 사용할 수 없고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서 해야하는데 3주 정도가 걸릴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본사는 바로 물건을 깔아줄 회사를 찾는다고 하시면서 다른 회사를 알아보라고 지시가 왔다는 것이다.
아직 입점할 물건이 회사 내부적으로도 정해지지도 않았고 서로 공유도 하지 않았는데, 3주라는 말에 이렇게 금방 말이 바뀔 줄이야. 세상은 무한경쟁시대이고 빛의 속도로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냉정한 세상이라는 것이 새삼 와닿았다.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다 나 스스로 높아지고 대견해하고 뿌듯해하며 내 발로 올라간 자리에서 시작된 일이 아닐까. 세상의 화려함, 유익을 쫓아가면 언젠가 겪게 될 일을 초고속으로 경험을 한 것 같다.
그 다음날 급행으로 하면 10일만에 만들수 있다고 했지만, 이미 강을 건넜다면서 다른 회사들과 동일선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본사에서 며칠안에 답을 줄거라고 했다. 사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지만, 갑자기 존중을 받다가 내쳐짐을 당하는 신세가 되는 것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고통이 컸던 것이다. 정말 짧은 기간에 큰 변화와 어려움을 해결하느라 지치고 방심한 사이에 뜻밖의 상황에서 제대로 KO를 먹은 것 같다.
이것이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는 시간이 말해 주리라.
다만 주어진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성실히 사는 것이 내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