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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작가 Jan 18. 2022

남편은 외계인, 시어머니는 빌런

어딘가 있을지 모를 영원한 해피엔딩을 내가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 온 지 이제 보름이다. 엄마표 집밥을 먹고 나만의 체취가 가득한 방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했다. 익숙함이 주는 마음의 안정을 흠뻑 느꼈다. 그러나 모든 게 그렇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유미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후~ 불어 촛불을 모두 껐다. 불이 꺼지자마자 옆에서 울음소리가 터졌다. 천장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울음소리였다. 또 다른 울음소리가 보태졌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은 뭐지? 내가 한 살 더 먹은 게 친구들에게 이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었나? 아니면 나를 대신해 일만 하다 결혼도 못 하고 나이 들어가는 내가 억울한 건가? 초에 다시 불이 켜졌다. 누군가 힘차게 훗훗~ 부는 입바람에 꺼진 불은 또다시 켜졌다. 이러기를 몇 번 더 반복하니 울음소리는 까르르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환하게 촛불을 밝힌 케이크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에는 내 양옆으로 미니어처처럼 작은 생명체가 여럿이었다. 사진을 찍어주는 친구는 연신 외쳐댔다. "자자 여기 보세요. 유미 이모 생일 축하해줘야지. 치즈~ 김치~ 웃으세요!" 이 낯선 상황에 적응할 새도 없이 다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건조한 날이었다. 울음은 여기저기로 옮겨붙었다. 작은 흐느낌은 또 다른 훌쩍임으로 이어졌다. 카페의 단체석에서는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정신없이 뒤섞였다. 통유리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이 유난했던 건조한 어느 오후였다.


흐느낌 사이로 A가 내뱉은 단어와 문장을 겨우 붙잡았다. 내 손에는 친구에서 입에서 나온 '남편은 외계인, 시어머니는 악당'이라는 말이 남았다. 쓴 커피를 한 모금 빠르게 들이켰다. 아이를 달래느라 일어선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그 이유를 들어볼 차례였다. 친구의 문장은 돌담 사이로 겨우 피어난 꽃처럼 울음소리 사이로 조금씩 새어 나왔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A의 상황이 본인의 일인 듯 온전히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별말 없이 위로가 건네는 이가 할 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테이블 끝에 나처럼 마른 표정을 띤 친구가 하나 보였다. 그해 가을 결혼을 앞둔 B였다. 미처 숨기지 못한 당혹감이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에서 전해졌다.


대학 친구들, 고등학교 친구들, 동네 친구들 등등 여러 모임의 풍경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성토 회장이 되기 일쑤였다. 사이사이 아이의 돌발 행동을 저지하려는 악다구니도 뒤섞였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수줍은 미소를 띠며 퇴장했던 그녀들의 미래가 이렇게 바뀔 줄 상상이나 했던가?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부부는 정녕 없는 것인가? "애 없을 땐 그래도 괜찮아", "결혼은 왜 하니?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아",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 아직 미혼인 나와 B가 종종 듣던 소리이다. 그녀들의 연애 고민과 결혼 준비를 함께 했던 우리였지만 정작 우리의 비슷한 고민은 나눌 수가 없었다. 덮어놓고 행복한 고민이라고만 하니 더 무슨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겠나?


친구들과 만남이 내게 주는 위로와 응원, 정서적 유대감은 점점 흐려졌다. 반발심마저 들었다. 아침 드라마나 일일드라마 속 막장 풍경만이 현실일 리 없다. 왜 디즈니 영화가 남녀가 만나 역경을 딛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 끝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냐며, 결혼은 현실이라는 따끔한 조언이 귀에서 튕겨 나갔다. 중국에서 여행하면서 사원이 보일 때마다 늘 대웅전을 찾아 빌었다. 성당을 다니는 친구의 배우자 기도를 모방한 기도였다. 수십 번을 외쳤던 그 문장은 '사랑받고 자란 마음이 넉넉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갖게 해달라'였다. 어딘가 있을지 모를 영원한 해피엔딩을 내가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어느새 확신이 되었다. 그래 난 꼭 그런 결혼 생활을 하게 될 거야.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은 정해졌다. 그럼 남자 주인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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