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미작가 Jan 19. 2022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왜 그리 자주 아픈지, 왜 그리 자주 울음을 터트리는지

그렇게 오랫동안 머무르게 될지 몰랐다. 그녀가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박사 논문 과제를 위해 미국 남서부의 나바호족 인디언 보호구역을 찾았을 때만 해도 말이다. 논문을 위한 자료 조사가 끝나고 떠나는 날 그녀는 1년 동안 자신을 손님이자 식구로 받아주었던 인디언 가정의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할머니는 그녀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시며 서툰 영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I like me best when I'm with you."

책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소개된 이 일화 뒤에 류시화 작가는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좋아지고 가장 나다워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여러 해를 돌고 돌아 그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재촉하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고, 덕분에 느리게 서로를 알아갔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꾸미고 포장하지 않아도 나 자체로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어색하지 않고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점점 그와 함께 있는 내가 좋았고, 그래서 그가 더 좋아졌다. 배우자 기도의 문장처럼 사랑받고 자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모두가 치기 어린 생각이라 비웃던 영원한 해피엔딩을 어쩌면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신부에게 우정이 비처럼 쏟아진다’라는 뜻을 가진 브라이덜 샤워의 기원은 16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혼을 올릴 형편이 되지 못하는 신부를 위해 신부의 친구들이 결혼 자금을 모아 선물한 것이 그 유래로 알려졌다. 그러나 영어 공부를 핑계로 <프렌즈>나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미국 드라마를 보고 자란 우리에게는 드라마 속 화려한 파티 장면이 더 익숙했다. 친구들이 한창 결혼하던 그때 어설프게 드라마 속 장면을 따라 파티를 준비했던 우리가 국내 브라이덜 샤워 1세대쯤 되었다. 친구들은 결혼이 가장 늦었던 나를 위해서도 브라이덜 샤워를 준비해주겠다고 날짜를 정했다. 이건 우리 사이의 일종의 품앗이였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된 것이다.



친구들이 알려준 시간에 맞춰 호텔에 도착했다. 소박한 장소였다. 벨을 누르자 어수선한 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창가에 걸린 현수막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테이블에 케이크와 와인잔 그리고 선물 등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자 침대 위에 쪼르록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모두 엄마가 된 친구들이 파티를 위해 아이들을 어디 맡기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연했다.  드라마 속 장면과 많이 다르긴 했지만, 최선을 다해준 친구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이렇게라도 와준 게 어딘가? 아이들아~ 제발 울지만 말아 주라. 나의 이런 바람은 10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깨져버렸다.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왜 그리 자주 아픈지, 왜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이면 더 심하게 아픈지, 왜 그리 자주 울음을 터트리는지 등등 그 이유를 몰라 답답했다. 아이들은 원래 다 그렇다는 친구들의 설명은 나를 납득시키지 못했고, 나는 그냥 어려운 문제를 대하듯 답을 외워버렸다. 물론 지금도 머리로만 이해할 뿐이다. 오은영 박사가 나오는 여러 프로를 통해 지식을 입력한 덕분이다. 어느 날 반려견을 키우는 싱글 친구가 육아에 지친 또 다른 친구와 공감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소외감을 느낀 적이 있다. 반려견조차 키워본 적 없고 조카를 돌봐본 경험도 없으니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할 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때는 내가 세상에 뒤처지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꽤 심하게.



날씨도 장소도 드레스도 메이크업도 모든 게 만족스러웠던 그 날도 그랬다. 왜 친구들은 오겠다던 시간보다 모두 늦는 건지, 왜 갑자기 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늘 제일 먼저 결혼식장에 도착해 폐백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사진을 찍어주던 나였다. 친구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과 찰나의 반짝이는 순간을 모두 담아주려 애썼다. 내가 가장 예쁜 날에도 그래 주길 바랐다. 너무 큰 기대였나? 사진을 찍어주기는 커녕 함께 사진 한 장을 찍기도 어려웠다. 신혼집에 놀러 온 친구는 결혼 앨범을 넘기며 예쁘다는 감탄을 쏟아내다 단체 사진에 자신이 빠진 게 아쉬운 눈치였다. 민폐가 될까 봐 신부대기실에도 오지 못하고 복도를 서성이며 우는 아이를 달랬다는 그날의 고충을 나는 그제야 들었다.



이해의 깊이는 딱 경험의 넓이만큼이지 않을까? 소설 《피프티 피플》속 유라는 길을 걷다 유난히 불행을 모르는 듯 깨끗한 웃음을 띤 얼굴을 보면 공격하고 싶은 기분이 된다고 했다. 왜 당신들은 불행을 모르느냐고 묻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유라가 적대감을 느꼈던 깨끗한 웃음을 띤 사람 중 하나였다. 불행까지는 아니어도 고통, 고난, 시련, 아픔, 슬픔, 그리고 삶의 고비마다 놓인 숱한 어려움 까지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한 만큼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그날의 하늘처럼 맑기만 했다. 결혼식 다음 날 공항버스 유리창에 부딪히는 세찬 가을비는 겨울을 재촉하는 듯 스산했다.

작가의 이전글 남편은 외계인, 시어머니는 빌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