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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작가 May 01. 2022

덕질도 태교가 될 수 있을까?

태교일기 [32w6d] 딱풀이에게 보내는 11번째 편지 (D-40)

딱풀아~ 임신 초반에 엄마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오로지 내게 찾아온 새 생명을 잘 지켜내야 한다는 간절함뿐이었어.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할까 봐 움직임을 최소화하려고 침대와 한 몸이 되어 하루하루를 보냈어. 마음 졸이던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안정기에 진입하면서 비로소 '태교'란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하지만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지.  

아이를 밴 여자가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일. 국어사전에서 '태교'를 검색해 보면 나오는 뜻이야. 딱풀이 너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엄마는 무엇을 해야 할까?

태교를 열심히 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다양한 활동에 '태교'라는 이름이 붙이더구나. 누군가는 손바느질을 해가며 직접 배냇저고리와 애착 인형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학창 시절에도 하지 않던 영어나 수학 공부를 열심히 했고, 또 누군가는 아기 두뇌발달에 좋은 클래식을 꾸준히 들었어. 엄마가 아는 한 지인은 임신 10개월 동안 매일매일 긍정 확언과 감사일기를 쓰고 시각화하면서 보냈다고 해. 그래서인지 지금 초등학생인 아이가 유난히 긍정적이고 자존감도 높다고.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초보 엄마의 팔랑귀는 사정없이 나풀거렸어. 내가 보내는 빡빡한 하루 어딘가에 '태교'란 것을 끼워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일었어. 한편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지 못한다는 '무기력'이 느껴졌어. 서로 대립되는 이 감정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어.

사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해야 하는 것도 해내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니 좀 우울하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있었어. 좋은 시절이 되면 어려웠던 시절을 깡그리 잊어버린다더니, 엄마가 꼭 그런 사람 같았어. 너를 잃게 될까 봐 초했던 마음은 점점 옅어졌고, 그 자리에 원래의 욕망이 스멀스멀 자리를 잡았어. 글쓰기는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지만 너는 지금 지켜야 하니 내게 진심인 글쓰기마저 잠시 내려놓고 잠을 더 청해야만 하는 현실. 물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자니 어느 한구석에서 쓴맛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지.

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한편으로 미뤄 둬야 했던 그 기간 동안 엄마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던 건 한 드라마였어. 엄마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딱풀이 너의 증조 외할머니는 엄마가 임신 소식을 전한 후부터 늘 임산부는 예쁘고 고운 것만 봐야 한다고 당부를 하셨어. 그런 당부가 아니어도 나 역시 혹시 너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걱정이 돼서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이 가능한 없는 드라마를 찾으려 노력했어. 코로나가 몇 년째 이어지니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가진 영상물이 크게 유행했고, 그 흐름을 탄 <오징어 게임>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과 같은 드라마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잔혹한 장면들이 많아 엄마는 볼 수 없었어.

대신 선택했던 드라마는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사극이었어.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성덕임'이라는 궁녀와 그녀에게 빠져들면서도 성군이 되기 위해 애쓰는 차기 군주 '이산' 사이의 애틋한 궁중 로맨스에 한동안 푹 빠져들었지.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이준호라는 주연 배우에게 옮겨갔고, 그 배우의 다른 작품이나 공연 영상, 인터뷰 등으로 확장되었어. 엄마의 취향을 알아챈 유튜브 알고리즘이 수많은 영상을 추천하며 밥상을 차려주니 일부러 찾아볼 필요도 없이 그저 수저를 들어 떠먹기만 하면 됐었어.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을 '덕질'이라고 해. 그럼 덕질도 태교가 될 수 있을까? 할머니 친구 중 한 분은 두 아들을 모두 결혼시킨 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셨어. 그러다 가수 임영웅에 빠져들게 되셨고, 그를 덕질하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으셨어. 나중에는 건강해진 아내의 모습에 감동한 남편분까지 동참하여 콘서트 투어를 함께 다니셨어. 덕질이 태교에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덕질이 뇌와 심장을 젊게 하여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지 않을까?



사실 태교에 대해서는 근거가 없다는 말도 많아. 태교 무용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분 중 한 분이 다태아 출산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서울대학병원 산부인과 전종관 교수님이셔. 그는 예능 방송 유퀴즈에 출연해 임산부의 삶의 질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태교에 죄책감을 갖지 말고 엄마가 자기 일을 잘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어. 엄마는 아직 너를 만나기 전이니 이렇다 할 태교 활동 없이 보낸 10개월이 네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어. 하지만 엄마가 더 많이 웃고 즐겁다면 그 감정이 네게도 전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또 엄마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했던 시간도 네게 긍정적인 영향을 줬으리라고 기대해. 어쩌면 네가 '덕질이 태교에 미치는 영향'의 근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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