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저 몸이 안 좋아진 줄 알았다. 병원에 증상을 알렸고 MRI, CT 등의 각종 검사를 했다. 재발, 뇌 전이 등을 걱정한 주치의의 당연한 조치였고 다행히 깨끗했다. 양방으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한방을 찾았다. 망양증이라 했다. 소음인이 땀을 많이 흘려 기력이 떨어진, 양기가 다 빠져나간 상황이라 했다.
한약을 먹으며 유투버 밀라논나와 닥터지하고의 책을 읽으며 몸도 마음도 회복되어 갔다. 그렇게 한동안 잘 보내는 듯했다. 그런데, 다시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나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슬럼프에 빠졌다. 몸이 아닌 마음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떻게 얻은 삶인가?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하는 생각에 몸의 문제라 단정하고 나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명상이 잘 되지 않고, 글이 잘 써지지 않았으며 일상의 루틴이 조금씩 무너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을 후회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던 오만을 후회했다.
후회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이 행위로 인해 발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후회라는 단어가 가진 괴로움, 절망과 같은 감정적 요소로 인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후회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선택했을 때 벌어질 일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중략)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는 건, 저 같은 뇌과학자에게는 '나는 내 전두엽의 시뮬레이션 기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표현으로 들립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 외에 다른 선택지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겠다는 건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 정재승 '열두 발자국' 중에서 -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코로나 장기화로, 온라인 수업을 받는 두 아이와 함께 집에서 생활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 보니 나의 마음에너지를 채워주는, 내가 좋아하는 읽고 쓰는 시간이 줄었다. 어떤 날은 한 자도 읽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하며 살겠다던 다짐을 지키지 못한 시간들이 쌓여 무너져간 것이다.
제 3자가 되어 나 자신을 관찰하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소홀했다. 이른 새벽 홀로 앉아 혹은 산을 걸으며 나에게 "괜찮니?"라고 묻겠다던 다짐을 지키지 못한 날들이 쌓여 무너져간 것이다.
원인을 찾았으니 이제 바람직한 모습을 위한 방안들을 실천하면 된다.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짐을 쌌다. 노트북, 일기장, 책, 필기구를 챙겨 집 근처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오픈 첫 손님으로 입장하여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차분한 시간을 보냈다.
제 3자가 되어 나를 관찰했다.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들을 돌아보며 원인을 찾고 내가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남편은 운동하러 산으로, 아들은 도서관으로, 딸은 친구들과 놀이터에 가고 없었다. 내가 마음 에너지를 채우는 동안 가족 구성원 모두 각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고요했다.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가장 먼저 하고 나니 그 이후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식사를 하고 남편과 함께 산책을 했으며, 집으로 돌아와 쉬고 책을 읽고 다음 주에 해야 할 업무를 점검했다.
암으로 5년을 헤맨 나는 표준치료가 종료된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했다. 나는 그 실천들을 꾸준히 하며 돌아보고 조정하고 더 나은 '나'로 살아가면 된다. 책을 덮고 나의 글을 다시 읽었다. 지금은 타인의 글에서 위안을 받는 것보다 나의 글, 내가 무엇을 하기로 했고 무엇을 실천했으며 어떻게 조정했고 왜 그랬는지 등에 대해 돌아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https://brunch.co.kr/brunchbook/deepthoughtlife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차를 마시고, 읽고 쓰고 에너지를 채운 후 오전 근무를 한다. 이후, 집안일을 하고 운동을 한다. 저녁식사 후 약을 챙겨 먹고 집안일을 마감하면 다시 책상에 앉는다. 오전에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하고 하루를 돌아본 후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다음날 일찍 일어난다.
어제도 이렇게 보냈고 오늘도 이렇게 보내는 중이다. 이렇게 슬럼프는 극복된 듯하다. 실행하고 돌아보고 조정하고 또 실행하며 살아갈 것이다. 흔들리고 무너지는 순간이 또 오겠지만 슬럼프임을 받아들이고 나를 관찰하고 또 이 글을 보며 한고개 넘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