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인 나의 글은 타인에 의해 손상되지 않으니 걱정 마시어요. 제 글의 의미는 저에게 있으니까요.
며칠 전 타인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이다. 이메일이었으나 편지라 표현하고 싶다.
타인의 요청으로 특정 모임을 대표하는 글을 쓰게 되었는데 작은 소란(?)이 있었다. 내가 썼으나, 나의 것이 아니었기에 문장이 사라지고, 단어가 바뀌면서 힘이 빠지고 의미가 사라지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여러 사람의 뜻을 담아야 하는 글은 서로 다른 그 뜻에 의해 변화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 변화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가 중요하다. 서로의 뜻을 모아 발전적으로 확장하고 상승해 가는 것을 지향한다. 서로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을 삭제하며 문제없을 것들만 남기는 형태가 상승일지, 하강일지, 현상유지 일지 사안에 따라 다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내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다. 해서, 상승할 수 있는 의견을 받아 수정하는 작업까지만 진행하고 해당 모임에 그 글을 넘겼다. 이후는 나의 것이 아니다.
초안이 완성되던 순간, 그때까지만 내 것이었다. 글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고 그에 맞는 스토리 라인을 잡고 단어와 조사를 선택하여 조합하는 그 모든 일을 내가 했고 그 결과물에 내가 만족했으니 이번 작업은 내게 의미 있다.
사회생활을 하며 셀 수 없는 보고서를 썼다. 그리고 그 보고서를 메일에 실어 보내며 그보다 더 많은 메일 본문을 썼다. 하나의 보고서를 직속 상사, 팀장, 관련부서 담당자 등에 보내며 첨부된 문서는 하나였으나 수신처에 따라 각기 다른 목적과 방향을 담은 메일을 썼다. 21년간 얼마나 썼을까?
누군가 나의 글에 이런저런 의견을 내는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직장생활 3년 차 까지는 빨간펜 선생님이 있었다. 20대에는 빨간색 네임펜으로 난도질당한, 너덜너덜한 보고서를 들고 화장실에서 눈물을 쏟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그 지적의 상당부분을 내가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고쳐갔다는 것이다. 실력 있는 좋은 선배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나를 괴롭히는 상사도 있었으나, 다행히 나의 글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의 보고서상의 작성자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 한자도 고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적을 받는 일이 줄어들었고 15년 정도 지난 후에는 그런 일이 사라졌다. 상사 역시 의견을 낼 뿐 직접 수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나의 글을 지적해 주기를, 나 스스로 바랬던 세 분이 계셨다. 그분들의 나의 글에 대한 지적은 나의 업무 방향, 방식, 때로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지적이었으며 그분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일의 전략, 방향, 방법론이었다. 그런 대화를 회의를 통해 하기도 했으나, 나의 글에 대한 지적은 오롯이 나를 향한 것이므로 얻는 것이 훨씬 많았다. 두렵고 싫으면서도 설레고 감사한 작업이었다. 그분들과 함께할 수 없어 안타깝고, 함께 일했던 그 시간들이 그립다.
그분들과 함께하며, 일이 내가 되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갔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고 그 일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 고민하며 작성한 글, 그 일이 내가 되어 작성된 글이어야만 그 뜻이 전달되고 일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워갔다. 물론, 모든 일에 그럴 수 없다. 먹고살기 위해 지시에 의해 해야만 하는 일은 적당한 수준으로 처리하면 된다. 해서, 그러한 일만 지시하는 상사와 일할 때는 대부분의 업무를 적당히 했다. 다른 목적으로 일했다. 내가 그 일에 동의할 수 없으니 그 일을 하며 내가 얻을 수 있는 보고서 작성 능력,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 일과 관련된 지식의 획득에 집중하며 다른 의미는 두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일하며 마음이 힘들었고 술을 많이 마셨다.
일이 내가 될 지경까지 고민하고 실행했던 것이 얼마나 될까? 21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인데 몇 개 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그 세분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분들이 한창 일할 때의 나이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되지 못했다. 나의 일을 한 단계, 두 단계 위에서 내려다보며 방향을 제시해 주던 스승과 같이 나도 후배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나만의 방식으로 스승과는 결이 다른 형태로 나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편지를 쓴다. 에세이 형태의 편지로 나의 생각, 그들에 대한 바램, 또 그 바램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전하고 있다. 내가 그들의 일이나 보고서 안에 들어가 그것을 헤집고 분해하고 재 조합해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보다, 일을 잘하기 위한 기반, 저력, 에너지를 키우는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정성을 내어 글을 쓰고 있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으나 내가 그것을 소망하고 나의 역할을 찾아 실천하는 것, 내게는 그것이 의미 있다.
작은 소란(?)은 글이 내게 갖는 의미를 돌아보게 했고, 나의 글이 향하는 방향과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다잡게 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글이 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점점 더 크게 느끼고 있다.
나 스스로 '작은 소란'이라 표현한 것은 이번 일이 내게 소란스러운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나를 중심에 두고 다른 것들을 활용한다. 일, 공부, 때로는 종교까지도 그 중심에는 내가 있다. 내가 살아 있고, 나의 에너지가 충분해야 그것에 마음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의 동요가 일어 다시 차분해지는 중이다. 속세에서 어떠한 일을 만나도 차분함을 유지하고 싶다. 과거에 비해 분명 나아졌으나 아직 갈길이 먼 것 같다.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게는 가려고 하는 시도와 실행이 의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