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챙기다

by 정원
육체의 모든 병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 플라톤 –


의사는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했다. 암은 적어도 2~3년 전, 길게는 4년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라며.


암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때의 나를 돌아본다. 당시 나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팀장은 나를 교묘하게 괴롭혔다. 팀원들 앞에서 나를 칭찬했고 특정 업무를 할 때는 꼭 내게 물어보라고 당부하며 남들이 내가 팀장의 신임을 받는 것으로 오해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집무실에 홀로 불려 가 인격적 모욕을 받고 그가 퇴직할 때까지 평가도 엉망이었다. 그는 업무적 성과는 칭찬했으나 인사기록에 남는 평가는 나쁘게 했다.


이런 상사도 있었다. 남자 후배들 몇 명을 앞에 두고 “워킹맘 자식들은 그지 새끼들 같다니까. 학교 끝나고 지네 집에 안 가고 친구 집에서 밥을 얻어먹어요. ” 20여분 가량 지속된 이야기의 일부다. 워킹맘인 나는 내 아이를 밥 얻어 먹이려 남의 집에 보낸 적도 없고, 주위에서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으며, 설사 그 사람이 그런 일을 겪었다 한들 내 앞에서 그렇게 크게 떠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직급이 나보다 높은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먼 훗날 반드시 네 딸이나 네 며느리가 꼭 나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이다.’ 라며 소심한 저주를 내 안으로 뱉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도 되지 않아 한의원을 찾았더니 화병이라 했다.

내 마음이 병들어간 시기에 암이 찾아왔고 늦게 발견되었다.



재발 이후 나는 조울증 환자 같았다. 어느 날은 힘들어 죽겠다고 남편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짜증을 냈다가 잠든 모습을 보며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이기에 상당 부분 남편에게 감정표현을 했고 그는 묵묵히 받아 주었다. 두려웠다. 내가 이렇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족들에게까지 병이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한번 찾아온 암은 떠나지 않고 다른 장기에 자리를 잡았다. 응급실을 찾는 날이 잦아졌다. 아들은 변기를 붙들고 구토하는 내 등을 두드리며 동생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방에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가족의 마음도 챙겨야 했다.


병원에서 만난 수녀님은 나로 인해 남편과 아이들이 각자 어떤 마음인지 대화를 나누어 아픔을 드러내고 달래 주라 하셨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무섭고 힘들었으며 내가 사라질 까 두려워했다. 나는 꼭 나아서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다.


아들에게는 본인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시키지 않아도 집안일을 돕는 아들에게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겠다 했다. 우리는 서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원하고 서운해한다. 하지만,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그래서 각자의 인생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딸에게는 감정을 너무 참지 말라고 했다. 아직 엄마를 찾고 응석을 부릴 나이인데 너무 애 어른처럼 씩씩하게 구는 딸에게 엄마한테는 솔직해도 된다고 했다. 대형서점에 가고 싶어 하는 딸에게 엄마의 백혈구 수치가 얼마이고 그래서 사람 많은 곳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솔직하게 대화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선택이라 믿고 실천하는 중이다.


남편과는 평소 많은 얘기를 나눠왔기에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가족들이 지치지 않고 그들 각자의 인생을 잘 살 수 있도록 나는 살피고 지원할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게 지난날 혹사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는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내게 필요한 일상을 반복한다. 기도, 명상, 차와 독서로 아침을 맞이하고 집안일, 산책, 반신욕 등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루에 한 번 무엇에든 감사한다.

통증이 심하거나 열이나거나 혹은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는 등 몸이 힘든 날, 특히 항암치료 직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한다. 암이 생기기 시작한 그 시절의 일들에 대해서도, 그저 당시에 운이 나빠 그런 사람들을 만난 것이라 여기고 그들의 행동과 나의 감정을 분리해 나의 에너지를 지켜내려 한다. 둘째의 사춘기가 시작되면 나는 아이와 거리를 둘 것이다. 첫째가 사춘기를 잘 넘긴 것처럼 둘째도 잘 넘기리라 믿고 그 과정 속에 깊숙이 들어가 나를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나서 힘든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서로 진심으로 위하고 마음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지금도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 힘든 시간이 오래가지 않는다. 몸이 아프다고 마음까지 아파야 하는 것은 아니니, 과거를 탓하거나 미래를 두려워하며 지금을 흘려보낼 수 없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눈 마주치고 이야기하고 퇴근하는 남편의 손을 잡아주고 무엇보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온전히 지금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삶을 지속하고 싶다.

keyword
이전 02화착한 암은 없다